‘너는 신자가 왜 성당을 가지 않니?’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빠지지만, ‘요즘 힘든 일 있어? 뭐 내가 해줄 수 있는 거 없어?’라는 말을 들으면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면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고 관심 받기를 원하니까요.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이웃들에게 사랑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특히나 소위 ‘골수’ 신앙인들은 다른 신앙인들 가운데 여러가지 사정으로 성당을 쉬고 있는 이를 만나면 곧잘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들의 그 부정적인 모습은 어찌보면 참으로 단순한 사고에서 시작되는 것이지요.
세례 받음 - 성당 안나감 - 십계명 미준수 - 구원 자격 미달 - 천국 못감
그러니 골수 신앙인들로서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천당에 가지 못한다는데 어찌 걱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람을 닦달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여기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습니다. 바로 계명의 미준수가 곧 구원자격의 미달로 이어지는가 하는 것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미비하다는 것이지요.
아주 간단한 예로 예수님의 안식일 미준수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그 일의 결말이 어찌 되는지 알고 있지요.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음을 부활로 입증했습니다. 보다 중요한 계명이 있으니 그것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아는 계명, 율법의 아래에 흐르는 것이지요. 마치 얼굴 모양이 다 다르지만 그 안에는 피가 흐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얼굴 모양이 어떻든 중요한 건 피가 흘러야 그 사람이 살아있게 되고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니까요.
단순히 한 사람의 외적 행태가 그 자체로 그 사람의 구원을 결정짓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경우가 될 수도 있지요. 즉 나름 열심한 신자라고 자부하고 있지만 실상은 전혀 엉뚱한 내면을 지니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신자들은 주일미사에 빠짐없이 참례해도 정작 마음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이들이지요.
우리는 사랑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죄인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관용과 자비와 기다림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는 곧잘 심판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운명을 애시당초부터 결정 짓고 일을 시작하는 것이지요. 정작 스스로의 구원에 대해서도 올바로 직시하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심판하는 사람은 심판 받게 됩니다. 우리는 심판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을 해야 하는 이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고 우리가 신자가 된 이유이지요.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겠다고 나선 이들입니다.
불안해 하지 마십시오. 자녀가 성당에 나가지 않는다고, 이웃이 냉담한다고 안타까운 표정을 짓기보다는 오히려 기쁨과 사랑이 가득한 얼굴로 다가서서 그의 이웃이 되어 주십시오. 바로 거기서부터 진정한 선교의 첫 단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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