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고, 약속된 것을 믿음과 인내로 상속받는 이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히브 6,12)
우리가 통상적으로 게으른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런 외적 일도 하지 않고 들어앉아 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성실함은 일을 많이 해서 무언가를 생산하는 사람이고 게으른 사람은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성실성의 징표는 바로 세상에서 드러나는 ‘결과물’이지요.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의 성실성과 게으름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세상이 바라보는 관점과 전혀 다른 결과를 얻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을 향한 발걸음의 척도입니다. 보다 구체적인 예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면서 나설 수 있습니다.
“아, 이번 주는 정말 바쁘게 보냈어. 평일 미사를 한 번도 빠지지 않았고 레지오 회합에서 3차까지 다 따라다녔지. 끈질기게 쫓아다닌 끝에 마침내 한 후배에게 성당을 오겠다는 확답을 얻어내기도 하고 말야. 아 정말 힘든 한주였어.”
하지만 하느님은 이런 말씀을 하실지도 모릅니다.
“얘야, 네가 드린 평일미사 안에서 너의 모습을 잘 살펴보거라. 너는 정말 미사에 감사한 마음으로 온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미사를 나온 횟수를 드러내기 위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나왔다. 그리고 너희 3차까지 있었다던 레지오 회합은 그야말로 어둠의 잔치였다. 거기에서는 수많은 어두운 생각들이 난무하고 있었고 서로를 드러내려는 교만과 아둔함이 가득하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술자리들에서는 이미 절제라는 가치가 사라져갔고 음란이라는 생각이 깃드는 것을 전혀 제지하지도 않았지. 그리고 네가 쫓아다닌 너의 그 후배는 너의 그 엉뚱한 끈질김 때문에 교회에 혐오감을 지니고 있으며 네가 지닌 그 우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락을 한 것 뿐이었다. 그 부탁을 듣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너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우리는 우리의 내면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오히려 울타리 밖으로 나가지조차 않는 봉쇄 수도원의 수녀님들이 더한 열정으로 선교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즉 그분들의 존재 자체 만으로도 사람들은 ‘거룩함’의 향기를 맛보게 되고 하느님에게 가까이 다가서려는 열망을 느끼게 되지요. 그래서 그분들이 하느님 앞에서는 더없이 성실한 사람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에 참으로 게으른 이들입니다. 반면 우리 자신들의 명성이나 부귀 영화를 얻기 위해서는 그보다 부지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제는 이 방향성이 조금은 바뀌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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