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수박을 사먹을 때에는 ‘잘 익은 것’을 고르려고 신경을 씁니다. 그 껍데기는 잘 익었다는 것을 분별하는 데에 최소한의 도움을 줄 뿐입니다. 바깥의 색깔이 연하거나 하면 속도 덜 익었다는 것을 상상하게 만들어 주니까요. 하지만 핵심은 속이지 겉이 아닙니다. 그래서 수박을 파는 이들은 속을 잘라서 보여줍니다. 겉과는 아무 상관 없이 속의 색과 맛을 보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그런 조각들을 베어물어 보고는 그 수박을 선택하는 것이지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속이 익어야 합니다. 신앙의 기술을 익히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지요. 신앙생활도 일종의 기술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성호를 어떻게 긋는지부터 시작해서 마치 군대 선임이 후임에게, 사수가 부사수에게 임무를 전수하듯이 일을 가르쳐 줄 수 있지요. 하지만 정작 전쟁이 났을 때에 용감하게 전투에 임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인 셈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다양한 외적인 면모들, 갖가지 신심 활동들과 여러가지 외적인 활동들을 섭렵할 수 있겠지만 핵심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랑을 하지 못하면 그 모든 신앙의 외적인 면모들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예컨대 레지오를 하는 것이 기도하고 봉사하는 것일진데 정작 힘든 일은 다 빠지려고만 하고 레지오에서 오는 명예로움은 얻으려고 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요?
신앙생활은 구체적인 사랑 속에서 익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훌륭하게 한 사람은 삶에서 향기가 납니다. 반대로 헛된 신앙생활을 하는 이는 자꾸만 엉뚱한 길로 흘러가서 그의 곁에 가면 향기가 나는 것이 아니라 뭔가 어색한 기운이 감돌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익힌 기술을 바탕으로 예전보다 더욱 교만하고 독선적인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수박은 익어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내적인 충실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척도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이 깊어갈수록 더욱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단순히 사랑스러운 사람을 향한 사랑만이 아닌, 때로는 내가 힘겹게 느끼는 이들을 향한 사랑이기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이유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내가 아직 초등학생인데 대학생의 전공서적을 읽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우리의 사랑에 버거운 사람은 하느님에게 맡길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늘 필요한 일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만으로 이 길을 걷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힘으로 이 모든 일을 이루게 됩니다. 절대로 자만하는 일이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늘 하느님 앞에 겸손하고 인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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