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처럼, 반항하던 때처럼. 거기에서 너희 조상들은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떠보며 시험하였다. 사십 년 동안 그리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 세대에게 화가 나 말하였다. ‘언제나 마음이 빗나간 자들, 그들은 내 길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분노하며 맹세하였다.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히브 3,7-11)
듣지 못한 이들, 듣기를 싫어하는 이들,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선물을 받지 못한 이들, 선물 받기 거추장스러워하고 귀찮아서 받기를 거부하는 이들, 그리고 선물을 받아도 뜯어보지도 않고 그 가치를 제대로 모르는 이들입니다.
선물을 받지 못한 이에게는 선물을 주면 그만입니다. 선물의 가치를 모르는 이에게는 가치를 알려주면 되지요. 하지만 받기를 싫어하는 이들에게는 답이 없습니다. 물론 받기를 싫어하는 이유도 참으로 다양하겠지만 선물의 가치를 알면서도 받기를 거부하는 이들, 그 선물을 주는 이 자체를 혐오해서 선물이 좋은 것인 줄을 알면서도 받지 않으려는 이들은 심각한 이들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을 즐겨 듣는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싫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느님의 교회에서 나오는 부산물은 좋아하지만 정작 하느님을 싫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얻어지는 세상의 매력들을 추구하지만 하느님은 거부하는 이들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분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입니다. 이집트를 떠나 광야로 나아가라고 약속의 땅을 향해서 한걸음 나아가라고 주어지는 초대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해 버리고 맙니다.
‘제가 언제요?’라고 말할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건데 하느님을 사랑했다고 착각할 것입니다. 주일미사를 빠지지 않았고, 판공을 제때 보았으며, 교회가 지키라는 것을 열심히 지키려고 노력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놓쳐 버리고 만 것이지요. 정의, 신의, 사랑과 같은 것들을 전혀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법과 규율은 지킬 줄 알았지만 전혀 사랑이 담기지 않았고 세상의 의로움, 법적 정의는 알았지만 하느님의 정의에 무관심했으며 세상의 초대에는 온갖 마음을 다 주면서 하느님에게는 전혀 충실하지 않은 탓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하느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결과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누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
코미디 프로를 보면서 순간 웃을 수는 있지만 마음 속의 진정한 충만의 체험은 이루지 못합니다. 그들의 쾌락은 찰나에 그칠 것이고 영원 안에서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원한 분을 알아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빗나간 이들의 운명은 처참합니다. 하지만 그 처참함은 여전히 가려져 있고 그들은 자신들의 현실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채로 여전히 세상에 물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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