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가 시작되고 만들어지고 난 뒤 그것의 뒤에 숨어서 그것을 따라가는 것은 참으로 편안한 일이다. 어찌보면 우리는 이런 편안함을 늘 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때 무언가 잘못 되더라도 탓을 남에게, 즉 이전 것에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설령 획기적인 새로운 생각이 있더라도 그것이 이전에 해 오던 것에 어긋나는 것이면 그것은 그대로 묻혀 버리게 된다. 그래서 이런 환경에서는 전혀 ‘새로움’을 발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새로움이 나오더라도 이전의 잣대로 모두 들이대어 보고 겨우 그 관문을 통과한 것이나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데 그러고 나면 그 처음의 신선함이 모두 너덜너덜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서서 일하기는 싫어하지만 대상을 두고 비판하는 것은 즐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낼 자신은 없지만 내가 알고 있는 지식에 빗대어 비판하는 것은 쉬운 일이 된다. 예수님이 등장했을 때에도 이러한 일은 벌어지고 말았으니 예수님의 새로운 계명은 또다시 이전의 계명들의 덕지덕지 붙은 장신구로 무거워져 버리고 만다. 하지만 매번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들의 시도를 벗어나서 또다시 새로운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결국 사람들은 그런 새로움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그분을 죽여 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성전과 예절의 뒤에 숨어 정말로 사랑하는 대상, 사랑을 쏟아야 하는 대상을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이다. 반면 예수님은 언제나 사랑하는 대상을 찾아 다녔다. 사람들이 모두 안식일법의 위중함에 짓눌려 있는 동안 예수님은 그에 아랑곳 하지 않고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치유해 버렸다. 예수님의 사랑의 새로움이 안식일 법 뒤에 숨어 있는 이들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 일을 통해서 수난을 겪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무언가의 뒤에 숨어 있는 이들을 꺼내오려는 시도는 반드시 반대의 물살을 견디어 내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첨단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은 어떨까? 우리는 기술의 진보에 환호하지만 과연 우리의 내면의 진보에도 환호할 자신이 있을까? 아이폰이 숫자 하나를 새로이 달고 나오면 그에 대해서는 배우려 하지만, 우리의 내면에 부족한 면모, 고착화되고 굳어져 버린 마음이 부서지고 깨어져야 할 때에도 환호할 수 있을까? 아니면 우리는 오히려 정반대로 과학의 새로움이라는 새로운 ‘틀’ 뒤에 숨어서 스스로 새로운 사람이라고 위안을 하면서 숨어 있지는 않은가? 마치 기술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처럼 착각학 있지는 않은가? 과학이 가난한 이들의 밥을 먹여주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 새로운 통신기술이 소외된 이에게 손을 내밀어 서로 소통하게 저절로 만들거라고 착각하지는 않는가? 로봇팔과 로봇 다리가 인간 이기심의 전쟁으로 인해서 생겨난 불구의 병사를 완전히 회복시킬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는가?
오히려 그러한 과학 기술들이 더 많은 소외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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