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다른 신자들이 사는 곳이든 우리가 사는 곳이든 어디에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들과 함께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 (1코린 1,2)
신앙인들은 서로를 알아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얻은 빛을 숨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가 가는 방향에 도움이 되어 줍니다. 앞서가는 사람은 뒤처진 사람을 끌어주고, 뒤처진 사람은 앞서가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하지요.
가는 목적지가 같기 때문에 사실 조금 늦어져도 상관이 없습니다. 방향만 바뀌지 않는다면 말이지요. 우리는 저마다의 자리에서 출발을 하고 그래서 누구는 빨리 누구는 늦게 도착하지만 결국 도착하는 곳은 같습니다. 바로 하느님이지요.
다만 그들이 거룩하게 되는 수단, 거룩하게 되는 길은 모두가 같습니다. 그분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하느님에게 다가가는 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통하여 성화가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누군가는 반발할 수도 있겠습니다. ‘예수를 모르면 구원받지 못하느냐?’ 그러나 이 질문은 올바로 물어봐야 합니다. ‘진리의 길을 모르면 구원받지 못하느냐?’ 질문이 이렇게 바뀐다면 ‘네, 그렇습니다. 진리의 길을 모르면 구원받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이 곧 진리를 안다는 것이냐?’라는 질문에는 신중하게 대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예수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아는 세례를 올바로 받아야 합니다. 예수를 지적으로 아는 것과 실천적으로 아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악마도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천하지 않았지요. 우리가 종교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사는 것과 예수님을 실제로 알고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두 가지 문제입니다.
헌데 누군가가 ‘진리의 길을 알기 위해서 꼭 예수이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저는 그렇다고 대답하겠습니다. 하지만 자기 탓이 아닌 상태로 예수님을 모른다면 그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서 심판받게 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예수님을 전했어야 마땅한 신앙인의 나태함을 지적하겠습니다. 교회가 있는 이유는 바로 신앙을 전하기 위해서니까요.
바오로 사도의 코린토 서간은 이런 깊은 내용이 담긴 호칭으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알게 됨으로써 진리의 길을 알게 된 이들을 애정을 담아 부릅니다. 그리고 저도 같은 방식으로 여러분을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다른 신자들이 사는 곳이든 우리가 사는 곳이든 어디에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들과 함께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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