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모세에게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을 시킵니다. 그러면서 그 일을 수행할 능력이 모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 당신에게 있음을 상기 시킵니다. 모세에게 남은 것은 ‘순명’하는 것이었지요.
이 순명이라는 주제는 참으로 쉽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통상적으로 ‘순명’에는 ‘나의 뜻과 반대됨’이 그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미 사탕을 먹고 싶은데 내가 순명해야 할 분이 날더러 사탕을 먹으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저항할 이유가 없을 것이고 그대로 수행하면 될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순명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사탕을 먹고 싶은데 내가 순명해야 할 분은 내가 ‘쓴 약’을 먹기를 바란다면 바로 거기에서 순명의 충돌이 빚어지는 것이지요.
모세는 지금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정말 하기 싫었습니다. 자신은 히브리 동포들에게도 또 이집트인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헌데 하느님은 바로 그들에게 가서 당신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수행할 능력의 근거로 다른 무언가를 주시는 게 아니라 바로 하느님 당신의 명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현대 세계의 흐름과 달리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교회가 민주주의였더라면 지금의 여러 제도와 위계 가운데 상당히 많은 것들이 전혀 다른 모습일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성직 주의도 아닙니다. 무조건 신부님이 옳다거나 심지어 사제가 뚜렷한 악을 저지르는 데도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바로 ‘하느님주의’입니다. 사실 이 두 단어, ‘하느님’과 ‘주의’라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인데 ‘주의’라는 것은 어느 하나의 노선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표현은 그 자체로 오류입니다. 그저 교회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할 뿐입니다. 그래서 사제와 신자들 모두가 하느님의 뜻이 어디있는지를 알고 그것을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교회’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그저 모든 이가 직접적으로 따르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그 맺고 푸는 것을 베드로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세우고 그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셔서 사람들이 그 교회를 보고 빛과 소금을 얻도록 하신 것이지요. 바로 거기에서 교회의 사도들과 그 뜻을 이어받은 사제들이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제들은 파견을 받아 사도로부터 이어 내려오는 사명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순명’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순명을 힘들어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의 뜻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 즉 우리 자신의 뜻에 대한 사랑은 우리가 더욱 똑똑하고 가진 것이 많고 더욱 높은 지위에 있을수록 부각됩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즉 잃을 것이 별로 없는 이들이 순명하기가 더 쉽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믿을 구석이라고는 하느님의 뜻 뿐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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