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마태 13,17)
제자들은 무엇을 보고 있을까요? 예수님의 썩 잘생긴 얼굴일까요? 아니면 그분의 화려한 옷감일까요? 아닙니다. 제자들이 바라본 것은 ‘하느님의 아들’이었고 ‘메시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은 다른 이들, 즉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와 같은 이들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전해졌습니다. 즉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저 단순한 성가심과 시기의 대상이었을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무엇을 보려고 하는가에 따라서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이 생겨납니다. 바로 눈 앞에 맛있는 케잌이 있어도 나의 후각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것의 본질적인 가치를 올바로 가늠하지 못하게 됩니다. 마찬가지 일이 이 세상에서도 벌어집니다. 우리가 아무리 ‘거룩한 것’을 눈 앞에 두어도 그것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마구 대하게 됩니다.
수많은 예언자들과 의인은 주 그리스도의 시대를 갈망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분의 은총이 넘쳐 흐르는 새로운 시대를 갈망했지요. 하지만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율법의 단편들’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많은 가르침과 더 많은 자비를 얻고 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으며 그저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다가온 지금의 시점에서 정작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면서도 그분에게 가르침을 구하지 않았고 그분의 조언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비유나 들을 뿐이었고 본질적인 가르침에 굶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것을 듣고 싶어하는 이들, 즉 당신의 제자들에게 그것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득이 되는 무언가를 기를 쓰고 이루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갈망하기 때문이고 그것을 알아보는 눈을 지녔기 때문이지요. 반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참된 가르침에 대해서는 둔감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갈망하는 마음이 없고 그것을 알아보는 눈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당에 나오면서 나름 열심히 활동을 하면서 그러한 것을 ‘찾는다’고 하지만 우리가 찾아 다니는 것은 단순히 말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정작 원하는 것은 돈벌이이면서 성당에 와서 ‘주님 주님’한다고 해서 모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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