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 10,34)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당연히 하느님이 말씀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마지막 목적은 ‘평화’입니다. 하지만 그 평화가 올바로 이루어지기까지 거쳐야 하는 과정은 ‘분별’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에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오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평화를 전하는 과정 속에 어쩔 수 없이 ‘분별’이라는 칼이 전제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를 구원하기 위해서 다가오시지만 모든 이가 구원 받지는 못할 것입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루카 13,3)
우리의 동참이 없는 구원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구원이 아니라 그저 원래부터 이루어져야 했던 하나의 과정에 불과한 것이지요. 우리가 거기에 참여를 하든 말든 아무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구원이라면 우리의 역할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우리는 그저 장기판의 말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자유’가 주어져 있으며 구원에 동참을 할 수도 그 구원을 거부를 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의 구원을 모든 이에게 선물하고 싶어하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이들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다가옴, 즉 예수 그리스도의 다가옴은 단순한 평화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애시당초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의 말씀에 순응하고 살았더라면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의 모습으로 다가올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구원자는 구원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인데 이미 모두 구원을 살고 있다면 굳이 다가올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세상은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져 있었고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단순히 한 두 사람에 의해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죄가 모든 이들을 물들여 버린 것이지요. 그리고 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는 다가 오십니다.
그분의 다가오심으로 사람들은 ‘선택’을 해야 하는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그 구원을 받아 들이느냐, 혹은 받아들이지 않느냐 하는 선택이지요. 그리고 그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하는 이들에 의해서 저항 세력이 형성이 되고 구원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 사이에 모종의 투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 칼을 체험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어느 순간인가 그 말씀 때문에 힘든 경우를 체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즉, 나는 미워하고 증오하고 마음대로 욕심내고 싶은데 말씀의 진리 앞에서 그러한 나의 개인적 사욕들이 저지당하는 경우이지요. 그러한 때에 우리는 저마다 복음의 칼을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칼은 수술하는 칼이요, 내 안에 있는 어두움을 도려내는 칼이지요. 그리고 그 칼을 받아들여 자신을 바로 세우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 즉 칼에 맞서 싸우려는 태도를 취하는 이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뒤이어 나오는 구절이 그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마태 10,35-36)
하느님의 뜻대로 자신을 올바로 세우는 이들, 그리고 그렇지 못한 채로 여전히 세상의 원리와 원칙에 따라서 자신을 앞세우는 이들이 서로 대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절대로 나약하거나 유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은 우리에게 진정한 용기를 가르칩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한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지요. 여기에는 타협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마몬을 모두 섬길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한 측은 사랑하고 다른 한 측은 무시하게 마련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