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악을 저지르는 이유는 그 악이 자신에게는 ‘선’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담배를 태우는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이성을 통해서 담배의 해악성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담배가 자신의 건강을 해친다는 것을 알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담배를 태웁니다. 왜냐하면 담배가 가져다 주는 일시적인 만족감이 다른 치명적인 결과보다도 더 달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담배를 태우는 그에게 담배는 다른 선택의 여지보다는 자신에게 ‘좋은 것’이 되는 것이지요. 담배를 태우지 않는 그 즉시 생겨나는 금단 증상보다는 담배를 태우면서 순간의 기쁨을 느끼는 것이 더 나은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악을 저지르는 이들에게서 일어납니다. 누군가를 험담하는 사람은 왜 그렇게 할까요? 그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사람은 왜 그렇게 할까요? 그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랑하는 것보다는 증오하는 것이 더 자신에게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태를 바탕으로 ‘영적 장님’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들은 사물들을 올바로 분별할 수 없지요. 그들은 어둠의 소리만을 듣기 때문에 눈 앞에 드러나 있는 선의 빛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 앞에 절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로 다가오라고 유혹하는 어둠의 소리에 따라서 절벽으로 한 걸음씩 내딛는 것이지요.
악을 저지르는 이들은 모두 영적 장님의 상태에 있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지요. 하지만 도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도움이 준비되어 있음에도 그들 스스로 그 도움을 수용하거나 거절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도움을 두고 오히려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무언가가 손상된다고 생각을 하며 그 도움을 거절하곤 합니다.
이런 꾸준한 자신의 자유의지의 그릇된 사용이 결국 자신의 내면에 모종의 ‘방향성’을 설정하게 됩니다. 악을 저지르는 자가 선의 초대를 받을 때에 처음 어느 정도는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거절을 하다가 나중에는 그냥 거절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러는 동안 자신의 모든 이성을 총 동원해서 자신이 악을 저지르는 것에 대한 합당한 이유를 마련하게 됩니다. 이성을 하느님을 찾을 수 있는 훌륭한 도구이지만 악한 의지에 의해서 사용되면 굉장한 계략을 만들어내는 도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악습은 또다른 악습을 불러오게 되고 그렇게 쌓여지는 악습은 결국 선에 대해서 무감각한 인간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선의 초대를 거절하고 특별한 순간에 다가오는 은총도 거절하게 됩니다. 그렇게 자신의 어둠을 서서히 완성해 가지요. 그러다가 결국 자신의 마지막 순간, 즉 ‘죽음’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죽음은 하나의 거쳐가는 단계, 영원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에 불과하지만 어둠의 자녀들에게 죽음은 그 자체로 두려움이고 심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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