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친교는 점검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한 자리에 함께 모여 있다거나 같은 행위를 한다고 해서 친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같은 체험을 나누고 같이 행동한다고 친교가 늘어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같은 영을 지녀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친교에로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물론 같은 영으로 나아가는 전단계는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상을 살아가는 인간 존재로서 아무런 만남도 없이 서로 친해지기는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그러나 우리의 만남의 목적은 뚜렷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즐거움에 머무르려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 드높은 곳을 향해서 나아가는 데에 서로 도움이 되기 위해서 만나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드높은 곳으로 나아간다는 의미가 세상의 어떤 드높은 곳을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 안에서 드높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함께 가는 이의 기회를 박탈하고 그를 짓밟고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혀 다른 차원의 높은 곳, 즉 하느님 계신 곳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서로 일치하고 돕고 사랑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누군가 뒤쳐져 있다고 해서 그를 내버려두고 우리끼리만 앞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를 기다려 주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앞서나가는 가장 빠른 길은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따라나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며 그 목적을 위해서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고 돌볼 줄도 알아야 합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봅시다. 악습에 젖어 있는 친구의 무리가 있습니다. 이 친구들은 늘상 술을 즐기고 유치하고 더러운 농담을 주고 받는 것을 즐깁니다. 깨달은 자로서 나는 이 무리에 다가서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그 무리에 다가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무리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방향을 알고 이끌어나가는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분별력을 작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무리의 친구들이 나의 영향력을 통해서 변화될 가능성이 있는 무리일 수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경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즉, 섣불리 다가선 그 무리로 인해서 도리어 좋은 뜻을 가진 친구가 악습을 체득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별력을 올바로 작용해서 나를 솔직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나에게 100kg짜리 역기를 들 힘이 없는데 그것을 들겠다고 시도하는 것은 엉뚱한 용기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들 수 있을만한 무게부터 시작해서 점점 익숙해져 나가고 그리고 나서 나중에 힘을 길러 100kg짜리도 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변화도 단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의 삶의 환경에서 이미 주어진 사람들을 늘 마주하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 작은 일들에 충실할 때에 나아가 더 많은 이들을 복음화 할 수도 있고 변화시킬 수도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의 친교는 반드시 점검되어야 합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그저 친하다고 몰려다니면서 도리어 악습을 습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친교’라는 명목으로 진정한 하느님과의 ‘친교’를 거부하는 이들입니다. 행여 우리가 그런 이들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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