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마태 10,16)
이리들은 굶주려 있고 양들을 공격하려고 합니다. 영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니 ‘이리와 같은 이들’은 늘 굶주려 있고 ‘양과 같은 이들’을 공격하려고 하지요. 이것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이리와 같은 이들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태어나면서부터 이리인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를 이리로 서서히 변화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악’의 문제는 신비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신비인 이유는 우리가 그 이유를 절대로 알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가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구체적인 내적 선택이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지는지 우리는 절대로 알 수 없기 때문에 악은 그 원인을 올바로 알아낼 수 없으며 그래서 ‘신비로운’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그 자신은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 자신은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망각된 상태인 경우가 많겠지요. 우리가 지금 겪는 고난의 시작점이 분명히 있음에도 우리는 때로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의 괴로움만을 바라보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그 시작하는 지점이 존재를 합니다. 우리가 심리 치료를 받으러 가면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지요. 원인을 밝혀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늑대’로 변해버린 존재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늑대가 으르렁 거리듯이 늘 불쾌하고 빈정대며 타인에 대해 험담을 하고 악습을 즐기는 상태를 유지합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은 자신들끼리는 함부로 공격하지 못합니다. 서로의 악함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공연히 같은 늑대를 공격했다가는 늑대의 무리에서 쫓겨날 수도 있고 행여 나보다 힘 센 늑대를 공격했다가는 내가 갈기갈기 찢겨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양을, 양과 같은 이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양과 같은 이는 순진하고 착하고 맑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진실하고 선하고 다른 이를 언제나 배려하고 소박하고 겸손하고 성실한 사람이지요. 이런 이들은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기 때문에 남을 돕겠노라고 곧잘 나서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이들을 훈련시켜 다른 이들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주님의 말씀을 듣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 양들이 마주하게 될 현실 안에는 ‘늑대와 같은 이들’이 잔뜩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잇속 만을 챙기고 괴팍하고 영리하기까지 한 그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부탁을 합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마태 10,16)
하느님의 자녀들에게는 비둘기의 순박함 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바로 ‘뱀의 슬기’도 필요합니다. 그 슬기는 공격해 오는 이들의 수단을 파악하고 그에 상응하는 사랑으로 대응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양들은 절대로 반격하지는 않습니다. 피치 못할 경우에는 상대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낼 뿐입니다. 그러나 할 수 있을 때까지는 그들의 수작을 알아내고 그에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 언급된 것은 쉽게 생각할 단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분별하기는 커녕 복수심에 활활 불타올라 자기 스스로를 또다른 늑대로 변질시키는 경우가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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