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자손들은 광야에서 ‘불평’을 시작합니다. 그 불평이 의미하는 바는 자신들이 왜 광야에 나왔는지에 대한 과거의 망각이었고 또다른 한편으로 이전의 삶, 즉 이집트의 억압받던 삶을 동경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지금의 하느님의 이끄심에 대한 현재의 망각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그들이 가 닿을 곳에 대해서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다가올 희망, 즉 미래에 대한 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먹여 주십니다. 그들에게 메추라기를 먹여 주시면서 그들의 아주 사소한 욕구 마저도 보살피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시고 또한 만나를 먹여 주시면서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먹여 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현재’라는 시간에 집중하게 만드셨습니다. 만나는 그 날 먹을 것 이상을 지닐 수 없는 음식이었습니다. 그 이상의 것을 모으면 그것은 반드시 썩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하루의 은총도 그날의 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그날의 행복 이상의 것을 원하기 시작할 때에 그것은 어떠한 형태로든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곧잘 수많은 것들을 벌어들이고 그것을 쌓아 두었다가 ‘내 자녀들’에게 물려 주기를 바라지만, 그러한 것들은 반드시 훗날에 부패한 결과를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 일용할 양식을 늘 주시고 전혀 부족함이 없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믿고 의지하면 됩니다. 만나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듯이 우리는 지나가 버린 과거에 미련을 두지도, 또 다가올 미래를 불안해 하지도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날 그날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느님의 은총이 있을 것이고 그로 인해서 우리는 전혀 부족함이 없이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서 우리에게 남게 되는 것은 오직 ‘감사’ 뿐입니다. 그리고 감사할 줄 아는 이는 절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기쁨은 계산이 아니라 감사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사치는 몇 푼 더 벌 때에나 기쁨을 누리지만, 하느님의 자녀는 시련 가운데에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십자가도 배움이고 우리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를 설명해내고 그것을 사람들이 적용하게 도와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제 배웠나 싶을 때에 그들은 또 돌아서게 될 테니까요.
주님에게서 바람이 일어나, 바다 쪽에서 메추라기를 몰아다가 진영을 돌아가며 진영 이쪽과 저쪽으로 하룻길 되는 너비로 떨어뜨려, 땅 위에 두 암마가량 쌓이게 하였다. 그러자 백성은 일어나 그날 온종일 밤새도록, 그리고 이튿날도 온종일 메추라기를 모았는데, 적게 거둔 사람이 열 호메르를 모았다. 그들은 그것들을 진영 둘레에 널어놓았다. 그런데 그들이 고기를 다 씹기도 전에, 주님께서 백성에게 진노하셨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매우 큰 재앙으로 백성을 치셨다. (민수 11,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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