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교리교사를 하던 지금은 소위 ‘냉담’ 즉 쉬고 있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늘 성당을 떠올린다고는 하지만 결국 모든 일은 그가 맺고 있는 열매로 분별할 수 있는 법입니다.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과 막상 그것이 닥쳤을 때에 귀찮아서 실천하지 않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기도해주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신부님이 기도는 하겠지만, 그 기도가 절로 너를 구원으로 이끌어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올바로 알아두어야 해. 결국 너 스스로가 선택하는 거야.”
그렇습니다. 우리는 타인을 도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타인은 끝까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구원은 절대로 ‘자동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어느 영성 깊은 사제를 개인적으로 안다고 해서 그의 영성이 자동으로 나에게 흘러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때에 비로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갑 사정을 걱정하는 것만큼 구원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것으로 자신들이 내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드러내는 셈이지요. 안타까운 말이지만 그들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자신의 내면이 간절히 추구하는 무언가입니다.
버릇처럼 ‘나중에 돌아오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하지만 저는 압니다. 지금 그것을 성찰하고 묵상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는데도 결정하고 실천하지 않는데 나중에 돌아오게 될 가능성은 더 희박해 질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그렇게 인생은 흘러가는 겁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삶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손길 안에 머무르지 않는 이상은 그냥 들판에 피어나는 풀꽃보다도 못한 삶이라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금’ 뿐입니다. 결심하려면 이 글을 마주하게 된 지금 결심해야 합니다. 나중이라는 시간은 하느님이 쥐고 계신 시간입니다. 다행히 그분의 은총으로 그 나중이 주어진다면 다행이지만 설령 주어진다고 그 기회를 올바로 취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쳐버린 이들은 훗날 밖의 어둠으로 쫓겨나 어리석었던 자신에 대해서 울면서 이를 갈게 되겠지요.
누군가 저에게 냉정하다고 하더군요.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분명히 일어나는 일에 대한 분별을 두고 그저 괜찮다고 하면서 거짓 위로를 주고 냉정히 대처하지 않으면 영혼들을 잃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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