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눈 앞에 주어진 대상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물질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용어를 좀 더 명확하게 구분하기 위해서 이를 애착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우리는 물질에 마음을 붙이는 것입니다. 그냥 책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 선물해준 책이 있다는 그 책에는 애착이 더해집니다.
우리는 동물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 역시 애매하긴 하지만 ‘애정’이라는 표현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동물의 본성적 아름다움에 우리는 애정을 느끼는 것입니다. 개들의 충성심과 고양이의 섬세함과 같은 것에 우리는 애정을 느끼고 그들을 반려 동물로 기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비로소 사랑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게 됩니다. 인격과 인격 사이의 사랑으로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는 물건에 대한 애착이나 동물에 대한 애정과는 다른 품격있는 사랑입니다. 하지만 다들 어느정도 짐작하듯이 사람을 애착하는 사람도 있고 단순히 애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군가의 외적 미모를 애착하는 사람, 그가 가진 성적 매력을 애착하는 사람, 그가 가진 외적 재물의 가치를 애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가 가진 성격을 애정하는 사람, 그의 온유함, 유머러스함, 친절함 등을 애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여전히 물건과 동물의 수준에서 사랑하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인격성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사람이라서 그가 영혼을 지니고 있고 그 영혼의 깊고 풍부함에 그를 사랑하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기에 사랑하는 것이지요. 인격적이기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오늘 복음의 주제에 가 닿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스러운 존재를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입니다. 사랑스러운 존재는 나의 본성에서 자동으로 끌리기 때문입니다. 마치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술에 이끌리고, 단 것을 좋아하는 어린이가 아이스크림에 이끌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보편적인 평범함만을 지니고 있어도 인간은 인간에게 이끌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라면 어떨까요? 인간에게 있어야 할 기본적인 선의 지향이 존재하지 않는 이라면? 그가 죄를 짓고 또 그것을 반복해서 짓는 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바로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용서’를 가르칩니다. 그래서 용서는 인간의 사랑을 넘어선 신적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고 진정한 신앙을 지닌 이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사랑이 됩니다.
다만 식별을 위해서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무턱대고 모든 것을 용서하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짓고 그 죄를 인지하고 뉘우치는 사람에게 용서가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아이의 뺨을 때리는 성인을 용서한답시고 그가 하는 행위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용서는 그 행위를 멈추고 그가 자신이 한 행위의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뉘우칠 때에 선물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용서가 진행될 때에는 진심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경의 표현을 따르면 마음으로부터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용서는 사랑의 고난이도 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구하려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 동참하는 이라야 용서라는 이름의 이 사랑을 실행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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