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좋은 분입니다. 그분의 좋음은 여러가지로 드러나는데 하나는 '공정'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공정하지 않은 주인이 있다면 그 밑에서 그의 기분을 맞추어 살아가는 이들은 즐거울지 몰라도 공정을 바탕으로 삼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나날이 괴로움일 것입니다. 다행히 하느님은 공정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부조리와 불공정은 반드시 훗날 바로잡힐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훗날이라는 것은 이 세상 안에서의 어떤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인 종말, 즉 모든 것이 완성되는 때를 의미합니다.
다른 한 편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당신의 선의 선물을 나누어 주시는데 굉장히 후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 '자비'를 나날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자비가 딱히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흔히 말하는 자비와는 그 결을 달리 합니다. 세상의 자비는 흔히 풍요로운 선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가 세속적으로 간절히 원하는 것의 허락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세속적 자비라야 그게 실제하는 것이고 내가 그것을 겪었노라고 말할 것입니다. 즉, 병의 치유나 어마어마한 일확천금의 기회 같은 것이 나에게 다가올 때에 우리는 무언가를 손에 쥐었다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주시는 자비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구원의 기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눈을 뜨고 보려고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기회입니다.
술꾼을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그에게 '술 마실 기회'는 눈에 보이는 좋은 초대입니다. 그는 초대받아 가서 술은 잔뜩 먹게 될 것이고 그러면 자신이 무언가 엄청난 좋은 것을 얻었다고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 곁에서 그의 건강을 걱정하고 가족의 미래를 걱정하는 아내, 즉 그에게 '술을 절제할 기회'를 주는 아내는 어떨까요? 그는 그런 그녀가 성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한 멀리하고 싶고 도망가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자비는 사실상 술꾼의 술초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엇나가는 그의 곁에서 그를 단도리하는 그녀를 통해서 풍성하게 전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일상에서도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거의 내팽개치듯 살아갑니다. 하느님의 가장 큰 자비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뜬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현세에서 남은 생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지요. 그 모든 나날들은 우리가 영원의 삶을 향해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기회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적지 않은 이들은 자신에게 다가온 또 하루의 기회를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하고 날려 버리곤 합니다. 아니 오히려 이런 나를 세상에 존재하게 한 하느님을 저주하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공정하고 후하신 분이십니다. 이제 시선을 조금만 돌려 비유의 이야기로 들어가 봅시다.
비유에서는 먼저 밭에서 일한 이들이 나중에 온 이들에게 '시기'하는 장면이 연출됩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수고에 비교해서 얼마 수고 하지도 않았는데 같은 기쁨을 누리는 게 속이 상한 것입니다. 즉 주인의 자비의 후함을 싫어하는 이들인 셈입니다. 자신들의 입장에서 한 데나리온은 새벽부터 고생했으니 정당한 임금인 셈이지만 반면 뒤늦게 온 이들에게는 그런 동등한 대접이 이루어져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그들이 크게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새벽에 일한 그들 역시도 자시들의 밭이 아니라 주인의 밭에 일하러 온 이들이라는 현실입니다. 자신들의 능력에 따라서 이루어진 계약이 아니라 주인의 부르심에 따라 이루어진 계약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주인이 애시당초 새벽부터 사람을 구하러 나가지 않고 오후부터 나가기 시작했더라면 그들 역시도 오후나 되어서야 일을 구할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느새 자신들이 선점한 영역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고 그들이 스스로 임금의 가를 정하고 그것을 역으로 주인에게 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은 자비로운 사람이었고 후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딘가에서 부름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이들입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부름을 받아 우리가 사는 나라에 태어났고 신앙을 선물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생이 지속되다 보면 마치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삶을 시작이라도 한 듯이 처신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이 삶이 우리 것이라면 죽는 것도 우리 마음대로인 양 착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보면 하느님이 하시는 행동이 너무나 싫고 내 기준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이 만든 세상 전체가 내가 바라는 모습이 아닌 것이 너무 싫습니다. 왜 악인들을 즉결처분하지 않는 것인지, 왜 의인들은 아침부터 땀흘려 일해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바로 그런 그들의 내면이 그들을 꼴찌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사명에 충실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의 상급을 기쁘게 맞이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존재가 될 터인데 그들은 다른 이의 뒤늦은 구원을 시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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