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죄를 지을 때는 용감하지만 죄의 결과가 다가올 때에는 더할나위 없이 약해지곤 합니다. 악습에 빠져들 때에는 그 달콤함에 그리로 달려가지만 그 악습의 결과가 자신에게 되돌아올 때에는 감당하기 힘들다며 탈출구를 찾습니다. 종교는 때로 그 대상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종교는 뒷수습을 위한 기관이 아니라 그 이전에 가르침을 주고 올바른 방향을 잡도록 도와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뒷치닥꺼리를 하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 상황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고 그것을 경고하여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하게끔 하는 것입니다.
제가 대외적으로 가지고 있는 별명이 하나 있습니다. '돌직구 신부'라는 말입니다. 이리 저리 재지 않고 핵심을 던진다는 뜻이지요.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저에게 본당 사제라는 직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편적인 신앙 생활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직설적으로 이야기해 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본당에 나오면 상황이 조금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어떤 종류의 경고가 그들에게 공격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능한 신경써서 그 점을 줄이고자 노력하지만 이것 저것 모두 신경쓰다가는 아예 입을 닫아야 할 판입니다.
사실 듣기 좋은 소리를 듣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다 늙어 여기저기 주름져 있어도 곱다고 해 주는 소리를 듣고 싶은 게 인간이고 여기 저기 엉망 진창인데도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대화는 그런 방향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서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그저 귀에 달콤한 말만 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연히 서로에게 싫은 소리를 해서 상처를 주어 관계를 불편하게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에제키엘서는 예언자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적습니다. 예언자는 지키는 사람이라는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지켜야 하는 것을 위해서 때로는 다른 것을 희생하기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어둠에서 지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소소한 감정을 적극적으로 돌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아이 피부에 상처가 난다고 바다에 빠진 아이에게 거친 밧줄을 던지지 않는다면 그의 피부는 살릴 수 있어도 그는 익사하고 죽어 버리고 말 테니까요.
그래서 예언자의 소명은 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가 맡고 있는 책무이며 그가 해야 할 일입니다. 사제는 뒷수습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징징대며 다가올 때에는 거의 대부분 상당히 늦은 경우가 많습니다. 사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단도리를 하는 사람입니다.
"네가 그에게 자기 길에서 돌아서라고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기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고,
너는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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