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여정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마땅히 이해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 변화될 수 없는 것이면 애시당초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의 삶이 고정된 것이고 변화의 가능성이 없는 것이라면 우리가 신앙 안에서 애쓰는 것은 모두 일종의 쇼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원래부터 정해져 있는 길을 두고 우리는 공연히 애쓰는 척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우리 스스로가 변화시켜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느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셨고 그분 이전에도 수많은 예언자들을 보내어 우리의 삶에 변화를 꾀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각을 바꾼다는 의미입니다.
- 의로움의 길과 그렇지 않은 길이 있다.
우리가 걷는 길은 모두 아름답기만 하고 존중받아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길 가운데에는 ‘의로움’의 길이 있고 그렇지 않은 길, 즉 ‘타락의 길’이 있습니다. 특히나 현대 사회는 이 길의 구분을 어렵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의로운 길을 마치 독불장군의 길인 양 평가절하시켜 버리고 반대로 타락의 길은 마치 그 길이 엄청 좋은 것인 양 치장하는 데에 정신이 없습니다. 간단한 예로 무턱대고 많은 돈을 버는 길은 그 돈벌이의 결과로 인해서 무조건 좋은 길이 되어 버립니다. 반대로 의인이 아무리 고생해서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고 산다고 해도 그 결과가 세속적으로 좋지 않은 것이면 그 길을 가는 사람이 멍청한 사람으로 취급 당합니다. 성소의 길을 젊은이에게 소개하면 그들은 그딴 길을 왜 나한테 요구하느냐는 식으로 대꾸하는 모습을 종종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로또를 사서 1등해서 일확천금을 벌 수 있다고 하면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현실 가운데 ’의로움의 길‘을 꾸준히 보여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변화 무쌍한 사람의 여정 가운데 이 길에 대한 가르침을 얻어서 생각을 바꾸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에서 그 대표격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그의 극기생활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표양이 되었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가 가르치는 여정을 따라 살아가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도 끝까지 마음을 바꾸지 않는 이들도 얼마든지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 아들에 대한 비유를 들어 가면서까지 그들을 다시 한 번 설득 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번째 항목을 찾을 수 있습니다.
- 예수님은 악인들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서 무던히 노력하셨다.
예수님은 악에 머물러 있는 이들, 고집스럽게 자신의 마음을 바꾸지 않는 이들을 위해서도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방치하지 않았고 그들을 저주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듣고 또 들어 언젠가는 생각을 바꾸도록 도우려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고 하는 이 말조차 악인들의 회개를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이유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듣고서라도 마음 아파하고 마음을 바꾸라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악인들의 고집스러움은 사실 대단한 것입니다. 오죽하면 파라오는 10번의 재앙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고집스럽게 이스라엘을 뒤쫓았습니다. 자연은 하느님께 반항하지 않습니다. 오직 인간의 고집스러운 악에 사로잡힌 마음이 저항을 계속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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