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100개의 사과를 가지고 두 사람이 나눌 때에 둘 다 50씩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은 사과를 수확하기 위해서 온 힘을 다 기울였고 다른 누군가는 그냥 분배할 때에만 도착을 했다면 그들에게 똑같이 주는 일은 공평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한 사람에게는 먹여 살려야 하는 가족이 5명이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 혼자 뿐이라도 그렇습니다. 이 밖에도 올바른 공평을 회복하기 위해서 고려해야 하는 사항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비록 일은 하지 않았지만 애초에 일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장애가 있어서 높은 곳에 있는 사과를 수확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처럼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공평만 해도 꽤나 복잡합니다.
하느님의 공평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우리의 인간적인 잣대로 그분의 업적을 살펴보면 엇나가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경우에 우리는 하느님을 공평하지 못하다고 비난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표현이 의인은 고통 당하고 악인은 편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악인은 수백억을 갈취하고도 변호사를 고용해서 감옥에 들어가지도 않고 반대로 마음이 양선한 이는 이런 저런 이들의 악행에 고통당하는 현실이 너무나 부조리해 보이고 그런 세상을 허락하시는 하느님이 너무나 불공평해 보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공평을 생각할 때에는 중심점이 바뀌어야 합니다. 즉, 우리의 합리성에 공평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공평하시니 우리의 생각을 그분의 공평성에 맞추어 가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즉, 지금 눈 앞에서 불공평해 보이는 모든 일들 속에도 하느님의 공평이 작용한다는 것을 굳게 신뢰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밝히 이해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들고 있는 휴대폰을 그냥 쓸 뿐 그 안의 기능을 다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심지어 과학의 업적이라도 우리가 모든 것을 밝혀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가지 과학적 공식 속에 존재하는 숫자가 왜 거기 들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과학자들도 여전히 밝혀내지 못한 이유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다행히 오늘 1독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공평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당신의 공평은 의로움과 악에 기초합니다. 세상은 마치 무게추처럼 서로간의 무게를 다툴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인간의 영혼 속에 존재하는 의로움의 무게를 재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공평의 핵심은 간단합니다. 의인은 상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하느님은 그 내면에 숨겨진 영역, 우리의 자유의 영역을 끝까지 주시해서 보십니다. 어제까지 의로움을 유지하고 있다가 오늘 악을 저지르기 시작하는 이는 악인이 됩니다. 반대로 어제까지 악을 저지르다가 오늘 의로움으로 돌아서면 그는 의인이 됩니다. 너무나 간단하고 소박한 내용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일이 그렇다면 죽기 직전까지 악인으로 살다가 죽는 그 순간에 회개하면 되겠네?” 감히 그런 상상을 하는 그대, 그렇게 살아 보십시오. 당신이 죽을 순간을 알고 있다면 그렇게 살아도 됩니다. 하지만 그걸 모른다면 당신은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일은 그렇게 쉽게 처리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회개라는 것은 성당 한 번 나왔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면의 깊은 변화는 그에 상응하는 많은 노력과 희생을 요구하게 됩니다. 마지막에 의인이 되는 이는 자신이 악을 저지르면서도 그 현실을 마음 아파하고 회복할 기회를 늘 마음에 품고 있던 사람이 그렇게 됩니다. 자기에게 다가온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살아갑니다. 반대로 의로움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지만 자신이 지금 누리는 것을 감사하지 않고 늘 죄지을 기회만 살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이는 유혹에 빠져들게 되고 죄 안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공평한 분이십니다. 지금 우리의 이해력에 그 공평함이 다가오지 않는다고 해서 없어지는 공평함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가장 선하신 분이고 의로우신 분이시며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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