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자 요한이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으면 적절한 반응은 다음과 같아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사람이다. 그가 빵을 먹지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것은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삶을 반성해서 지나치게 빵과 포도주에 빠져 있는 세속적인 경향은 없는지 잘 찾아보고 미리 예방할 것이다.
반면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는 것을 보게 되면 적절한 반응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분은 하느님의 거룩한 외아드님이시다. 저분이 우리의 먹고 마심의 행위를 하신다는 것은 그 먹고 마심의 행위 안에 하느님의 거룩한 사명이 함께 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모든 행위 속에 하느님의 고귀한 뜻이 들어있음을 깨닫고 하느님의 외아드님이 살아가는 방식을 본받아 일상 안에서 하느님을 찾아야 할 것이다. 또한 그분은 우리에게 다가오신 신랑이시다.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슬퍼할 수 없다. 그러니 기쁨으로 그분과 거룩한 먹고 마심, 즉 성찬례에 동참해야 하겠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해석하고 싶은 대로 해석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엄격한 생활은 마귀의 처신으로 곡해되었고 사람의 아들의 고귀한 강생의 생활은 인간적 타락상으로 해석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소명은 멈추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이런 저런 해석에 휘둘리어 가는 길을 멈추지 않습니다. 지혜라는 것은 영원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뜻을 의미합니다. 흔히 사람에게는 이 지혜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에게 득이 되는지 아닌지만 바라보고 그마저도 영원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게 아니라 현세적 이득을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사제가 와서 당장 자신의 배를 불려주고 기분을 좋게 해 주면 거기에 취해서 그 사제를 좋은 사제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장기적으로는 그릇된 방향성을 지니고 있어 양들을 목초지로 인도하지 못하게 되면 결국 그는 딱히 좋은 사제가 아니었음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제가 와서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대로 이끌어 가지 않으면 그는 나쁜 사제라고 욕을 먹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그 사제가 근본적으로 의도한 것이 뒷날 꽃을 피우게 되면 그제서야 사람들은 그 사제가 진정으로 좋은 사제였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알아보는 것은 지혜가 하는 일이고 그 지혜가 내 안에서 올바로 작동하려면 우리는 성령에 힘입어야 합니다. 세상을 세상이 바라보는 식으로 해석하지 말고 성령께서 우리는 이끄시는 방향으로 읽어낼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큰 일을 하시는 분이시지만 당신의 그 큰 일은 너무나도 초라하고 작고 연약한 한 아기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지혜를 망각하지 말고 우리의 일상의 충실함을 채워 나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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