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듣기가 어려웠습니다. 신부님도 많지 않았고 성경도 비쌌습니다. 그래서 어쩌다 들리는 말씀 하나를 마음 깊이 간직하고 되새기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듣기가 쉽지 않으니 들을 기회가 생기면 더 열렬히 듣고 더 깊이 새겼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새겨들은 것은 곧 그들의 삶이 되었습니다. 언제나 생각하고 묵상했기에 들은 것이 자연스럽게 그들의 사고가 되고 말이 되고 생활이 되었던 것입니다.
반면 요즘은 듣기 좋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스마트폰 있는 사람이면 성경 없는 사람이 없는 셈이고 원하면 언제든지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인터넷과 영상 문화까지도 발달을 해서 텔레비전을 틀어도 훌륭한 신부님들의 강의가 나오고 유투브에도 좋은 가르침이 넘쳐 흐르는 시대입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듣기를 소홀히 하기 시작합니다. 들어도 너무 많이 들어 버려서 딱히 마음에 새겨지는 것이 없고 또 언제든 들을 수 있으니 오히려 더 듣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성경을 원하면 마음껏 볼 수 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히려 성경을 읽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더 많이 열어주고 더 많이 개방하면 더 잘 들을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오히려 듣지 않는 시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반대로 듣고 싶은 것들에는 더 쉽게 귀를 기울입니다. 좀 더 재미난 들음에 자신의 귀를 쉽게 빌려줍니다. 들을 수 있는 게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지자 더 자극적이고 재미난 것, 흥미롭고 실용적인 것을 듣고자 하는 통에 재미없는 들음, 인내와 더불어 자신을 구체적으로 수양해야 이해할 수 있는 가르침들은 재미없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자꾸 후순위로 밀리기 시작하고 그런 가운데 신앙의 본질적 가르침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 흥미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듣지 않는데 무엇을 실행할까요? 우리의 신앙은 잘 들어야 하지만 그 들은 바를 실행할 때에 비로소 완성이 되는 법입니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악마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고 성경 말씀도 줄줄 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아는 바를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렇다면 듣기만 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지 못하는 셈입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를 악마의 도구로 쓰이게 할 수도 있습니다.
들은 바를 실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성경은 단순히 지식을 증진시키고 서로의 견해를 다투고자 존재하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듣고 실행하기 위한 책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