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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떠날 때에




오늘 가르침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당신의 제자로서 마음을 굳힌 이들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과외 수업입니다그래서 마음이 없는 사람이 들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실행하지도 못합니다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누구나  부르심을 받는 것은 아니고  누구나  응답하는 것도아니기 때문입니다모두가 수도자가   없고 모두가 사제가   없습니다저마다의 고유한 부르심이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소유에 대한 집착의 포기를 말합니다동시에 소유를 포기함으로써 얻게 되는 하느님에 대한 의탁을 의미합니다예수님의 제자들은 특별히  많은 포기를 요구 받았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세상의 힘에 의탁하지 않을내적 포기를 의미합니다무턱대로 가진 것을 내던진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깨달음을 통해서이루어집니다가진 것이 많아도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인지하고 있고 하느님의 뜻을 기다리고 올바른 사용처를 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진 것이 쥐뿔도 없는데 마음  탐욕은 어마어마한 사람도 있습니다전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 중이고 후자는 겉으로는 없지만 마음 속으로  가진 사람인 셈입니다.


머물러라

현세에 대한 올바른 처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그곳에 머물러야 합니다이는 그곳에 집착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을 수용하고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가정을 꾸린 사람이 말도 안되는 이상을 꿈꾸면서 가정을 소홀히 하거나 성소를 받아들인 사람이 다른 길을탐내서는 안됩니다우리는 우리가 받아들인 영역에 머물러야 하고 떠나는 순간까지 거기에 충실해야 합니다.


또한 끈기와 성실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특히나 현대의 한국 사회에 너무나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곳에 머무른다는 것은  곳의 좋은  만이 아니라 나쁘고 싫은 것까지도 인내로이 견뎌야 한다는이야기입니다과거에는 좋건 싫건 머무를  알았고 견딜  알았습니다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사는 것은어리석은 것이라 하면서 원하는 것을 찾아다니게 합니다그러다보니 자신이 믿는 바도 버리고 자신의 가정도 버리고 자신의 생명도 버리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납니다.


먼지를 털어 버려라

우리의 파견은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 아닙니다파견된 이는 파견한 분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헌데그런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의 인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여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의미가 됩니다그렇다면 그들과 우리는 길을 달리하는 사람이 됩니다그때부터는 모든 것을 털어내어야 합니다우리 측에서도 그들을 향한 미련을 털어내어야 하고 그들 측에서도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없도록 관계를 정돈해야 합니다 상징적인 행위로  밑의 먼지를 터는 것입니다파견된 이의 메시지를 거부한 고을의 운명은 처참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다

제자들의 소명을 다시   되새겨 봅시다그들이 하는 일은 건물을 짓는 것도 조직을 만드는 것도 사람들의 송사를 돌보는 것도 아닙니다그들이  일은 단순합니다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고 병을 고치는 일입니다사람들의 영혼에 그리스도의 핵심적 메시지를 전하고 그들이 앓고 있는 영적인 병들을 고쳐 주어야합니다이것이 파견된 이들이 해야 하는 일의 핵심입니다다른 것은 모두  근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부수적인 요소들입니다.

댓글

젬마님의 메시지…
아멘 신부님
이 글 제가 공유해도 될까요?
겸손과 기도님의 메시지…
공유하셔도 됩니다.
젬마님의 메시지…
아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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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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