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주로는 시냇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다는 표현처럼 생명을 주는 수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어떤 때에는 일을 방해하고 망치는 요소로도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건너야 했던 홍해바다입니다. 물은 사람을 덮치고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합니다.
오늘 독서에도 물이 등장합니다. 이 물은 이스라엘 백성의 진로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약 궤를 맨 사제들이 그 물로 다가서서 그 물에 발이 닿자마자 물이 멈추어 섭니다.
이 물은 세속성의 물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약 궤를 맨 사제들은 하느님의 거룩한 의지를 수행하는 사제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세속성에 휩쓸려 살아갑니다. 세속성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 곳은 결국 '소금바다'로 대변되는 '죽음'이라는 멸망입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여러가지 활동을 하고 살려고 애를 쓰지만 결국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 앞에서 좌절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의 계약 궤를 지니고 가는 사제는 사람들의 그 죽음의 흐름을 잠시나마 막아 줍니다. 사제들이 전하는 말씀의 힘은 우리에게서 '영원의 희망'을 갖게 하고 사람들을 잠시나마 세속성의 흐름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그래서 온 이스라엘, 즉 하느님의 백성은 그 물을 피해 마른땅을 밟고 건널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이 요르단 강을 건너라고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이어 새로운 지도자인 여호수아를 앞에 두고 있었고 이 지도자의 진정성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 일종의 이벤트를 기획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여호수아의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여호수아에게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일이 오늘날에도 일어납니다. 한 사제의 진실성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제의 역할 가운데 하느님의 손길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속성의 물길 속에서 갈팡질팡 하던 이들이 사제의 신심 가득한 설교를 듣고 세속성의 물길이 멈추는 것을 보게 되면 사람들은 그 사제의 가치를 알아보게 되는 것이고 그 사제를 존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바로 그런 역할을 하는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증오는 마치 물길과 같이 이리 저리 흐르면서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에 다가서는 것을 막아서는 요르단 강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비유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이 증오를 멈추고 길을 건널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여전히 세상에는 증오와 원한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사랑하는데 불구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호수아의 사제들이 한 것 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그 요르단 강을 건너야 합니다. 그런 작은 성공에 힘입어 우리는 우리의 마음 속을 잔뜩 차지하고 있는 가나안족이라는 이름의 세속성을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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