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미사때 종종 웃습니다. 그러나 그 웃음은 그 순간의 즐거움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안타까움의 웃음이기도 합니다. 울음이 꼭 슬퍼야만 나오는 것이 아닌 것과 비슷합니다. 너무 감격해도 사람은 웁니다. 마찬가지로 웃음도 너무 허탈하면 웃기도 합니다.
사제로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는 선택을 의미합니다. 세속성이라는 것을 눈 앞에 두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온갖 쾌락을 모르고 사제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 ‘선택’하는 것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사제는 사제로 살아감을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안에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사제는 하느님과 더불어 살겠다는 직분이며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전하는 직분입니다. 그래서 사제 생활은 언제나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위치합니다.
하느님 앞에 선 사람으로서 나는 나의 인간성을 직면하게 됩니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사제는 세상의 좋은 것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매력을 늘 일깨우고 세상 것들의 헛됨을 다시금 되새기면서 사제 생활이 유지됩니다. 신앙의 진리 안에 머무르면서 하느님만이 진실로 영원하시고 세상은 죽음이라는 것을 통해서 언젠가는 이별해야 하는 현실을 되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제는 검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것입니다. 세상에 죽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반면 사제는 사람들 앞에 서 있어야 합니다. 어떤 때는 자기 스스로도 챙기기 힘든데 사람들에게 신앙의 진리를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나날이 경험하듯이 사람들은 영원의 진리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차라리 세상의 진리를 선포했더라면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시장통에 고등어를 아주 싸게 판다고 하면 오히려 사람들의 귀에 솔깃한 이야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는 어제 전하면 오늘 까먹고 오늘 전하면 내일 까먹고 맙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런 표현을 합니다.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고 말이지요. 왜냐하면 가장 큰 축복을 받은 민족이 하느님의 아드님을 받아들이기는 커녕 못박아 죽여 버렸으니까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 영광, 여러 계약, 율법, 예배, 여러 약속이 그들에게 주어졌는데도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핏줄인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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