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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떨어집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제자들을 당신과 떼어 놓으십니다. 얼마든지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두고 당신이 하겠다고 하시며 제자들을 일부러 배에 태우고 호수를 건너게 하십니다. 마치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보내고 거기에서 시련을 당하게 되는 것처럼 하느님은 때로 당신의 현존을 우리에게서 감추시고 우리를 위기 상황에 두십니다.


그러는 동안 예수님은 산에 오릅니다. 마치 제자들의 일이 당신과 상관 없다는 듯이 바로 제자들을 뒤쫓아가지 않고 당신은 하느님과의 만남의 시간을 갖습니다. 때로 일이 아무리 바빠도 우리는 하느님과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일을 더 잘하게 되고 바르게 하게 됩니다. 조급하게 처리하다가 망치는 일이 많고 깊은 숙고를 거치지 않은 일은 오히려 일을 더 키워 버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에서 우리의 일상을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일이 바쁠수록 우리는 기도하는 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아니나다를까 주님 없이 떠난 제자들은 위기에 봉착합니다. 호수 한가운데에 위치한 배에 맞바람이 불고 파도가 밀어 닥칩니다. 제자들은 앞으로 나아가려고 고군분투 하겠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을 것이 뻔합니다. 우리의 인간적 능력은 언제나 한계를 지니고 있고 우리가 아무리 발달된 문명과 과학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우리의 일상의 소소한 문제 하나 올바로 해결하지 못하는 때가 많습니다.


바로 그때에 예수님께서 다가오십니다. 헌데 제자들의 눈에는 그분이 늘 마주하던 따스하고 다정한 분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배에 밀어닥친 위기 때문에 오히려 그분이 위험한 요소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외칩니다.


"유령이다!"


우리가 신앙에 대해서 가지는 평소의 마음은 긍정적입니다. 그냥 좋은 가르침이다 정도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속에 허덕일 때에 신앙이 다가오면 우리는 신경질적으로 변합니다. 왜 그딴 소리를 지금 나에게 하느냐며 정색을 하기도 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보고 반기는 게 아니라 도리어 겁을 집어먹은 제자들과 같은 모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강직하고 따뜻합니다. 용기를 북돋우고 두려움을 없이 하는 말씀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용기를 냅니다. 주님이시라면 이 위기를 헤치고 당신께 나아갈 수 있는 초인적인 힘을 허락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허락하십니다. 물 위를 걸어 오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절망할 위기의 순간에 신앙 안에서 힘을 얻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반 사람이라면 상상을 못할 영적인 힘을 바탕으로 꿋꿋하게 생을 이끌어 갑니다. 아무리 풍랑이 몰아닥치는 거친 물이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을 믿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이는 얼마 가지 못합니다. 베드로는 거센 바람에 두려움을 느끼고 지금까지 극복해 오던 물에 다시 빠져듭니다. 우리도 신앙 안에서 열성을 내면서 하느님을 바라보고 나아가다가 다시 세상 걱정, 현실 걱정에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는 멋들어진 모습이었지만 베드로는 초라한 모습으로 바뀌고 맙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 주님에 대한 신뢰가 남아 있습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그러자 주님은 곧 다가와 그를 물에서 꺼내 주십니다. 물 위에 서 계신 예수님이 물에 빠진 무거운 베드로를 거뜬히 들어 올려 주십니다. 이것이 '은총'이라고 부르는 영역입니다. 우리는 때로 죄악이라는 물에 빠집니다. 그리고 고해성사라는 은총의 손길을 체험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모든 어두움을 넘어섭니다.


그렇게 둘은 다시 배에 돌아옵니다. 그러자 바람이 그칩니다. 

신앙의 훈련 - 첫 신앙의 두려움 - 은총 생활의 설렘 - 쓰러짐과 청원 - 하느님의 은총의 체험을 겪은 이들은 이제 튼튼한 신앙인이 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를 괴롭히던 위기들은 더이상 위기가 아니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실존을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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