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와 복음은 재미난 대응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1독서에서는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이 하느님 앞에 갖는 무기력함과 불신을 나타냅니다. 반대로 복음에서는 심지어 유대인도 아닌 여인이 예수님을 성가시게 쫓아다니며 인내와 용기로 믿음을 드러내고 그 믿음 안에서 응답을 받습니다.
먼저 약속된 땅에 가까이 이르러 파견된 정찰대는 그 민족의 강인함을 보고 하느님께서 해 주시는 약속을 무력화 시켜 버립니다.
"우리는 그 백성에게로 쳐 올라가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강합니다."
심지어는 그걸로도 만족을 못하고 다른 이들의 의욕을 꺾어 버리기 위해서 나쁜 소문까지 퍼트리게 됩니다.
사실 이런 식의 대응은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가 강론을 마치고 신자분들과 식사를 할 기회를 얻게 되면 가끔씩 신앙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시도해 보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거의 다음과 같은 대답으로 무산됩니다.
"아이고 신부님,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쉽지 않습니다. 신부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안됩니다."
숨쉬듯 쉬울 것 같으면 아예 시킬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불가능할 것 같으면 하느님이 하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문제는 할 의욕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명령을 수행할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이라서가 아니라 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모세에게 꽤나 강한 선언을 합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전해지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고스란히 한 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이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너희가 내 귀에 대고 한 말에 따라,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그대로 해 주겠다.
바로 이 광야에서 너희는 시체가 되어 쓰러질 것이다.
너희 가운데 스무 살 이상이 되어, 있는 대로 모두 사열을 받은 자들,
곧 나에게 투덜댄 자들은 모두,
여푼네의 아들 칼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만 빼고,
내가 너희에게 주어 살게 하겠다고 손을 들어 맹세한
그 땅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저 땅을 정찰한 사십 일, 그 날수대로,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너희는 사십 년 동안 그 죗값을 져야 한다.
그제야 너희는 나를 멀리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그 자리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칼렉과 여호수아만 빼고 약속된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결국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오늘날의 가톨릭 신자들도 깊이 숙고해 보아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럼 분위기를 조금 반전시켜서 복음을 묵상해 보도록 합시다. 이번에는 가나안 지방의 한 부인이 나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자신의 청을 들어달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예수님에게서 1차로 입구컷을 당합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분명한 사명이 있고 그것은 우선적으로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이 퍼져 나가 온 세상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이방 여인에게 이 말은 상당한 충격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거절당하는 것은 쉬운 체험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멈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더 낮추고 도와 달라고 청을 합니다. 여기서 두 번째 거절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거절의 강도는 굉장히 심한 편입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성경 안에서 고상하게 표현된 이 말을 좀 더 직접적인 느낌으로 바꾸어 보면 '나는 우리 자식 먹일 밥을 개새끼들에게 주지 않는다'는 모욕적인 언사입니다. 하지만 여인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모욕을 기꺼이 수용하면서도 자신의 지혜 안에서 청을 드립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이제 그녀를 위한 시험은 모두 끝났습니다. 그녀는 주님의 칭찬을 받고 원하는 것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을 마치 등록만 하면 얻게 되는 자격증처럼 간주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시험 당할 운명에 놓여 있고 그런 시험을 통해서 진실한 신앙이 검증되게 됩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마냥 편하고 좋은 신앙을 찾는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그건 신앙 생활이 아니라 취미 활동인 셈입니다. 사실 그렇게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고 그래서 자신의 취미에 맞지 않을 때에는 가차없이 던져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취미스런 종교활동'을 한 것 뿐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시련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칼렙과 여호수아가 할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은 것처럼 우리도 하늘 나라를 앞에 두고 할 수 있다는 용기를 내면서 서로를 도와야 합니다. 또 이방 여인의 믿음처럼 갖은 시련에도 끝까지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놓치지 않고 매달리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훗날 우리를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그 칭찬이야말로 세상 어떤 인간 존재의 칭송보다도 더 존귀한 영광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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