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부인에 대한 이야기는 여인의 믿음에 대한 이야기 전개가 주를 이룹니다. 그러는 사이 쉽게 간과되는 부분이 하나 있으니 그건 바로 그녀의 딸이 '마귀가 들렸다'는 것입니다.
특히나 현대에 일어나는 여러가지 사건들 속에서 우리는 '심리'라는 것이 대체해 버린 해석에 둘러싸여 마귀의 활동을 거의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영적인 영역과 함께 가는 세상입니다. 심리는 어찌 보면 '정신의 과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세균이 들어와 유기체를 감염 시키듯이 정신적인 특정 영역에 미치는 영향이 그 사람의 심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고 그것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심리라고 부르는 과학은 '영혼의 활동'에 대해서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영혼의 활동은 심리라는 과학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변수'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이 작용을 하려면 모든 것이 순리에 따라서 이루어져야 하고 그 올바른 원인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영혼의 작용, 특히 자유의지의 변동성은 과학이 도저히 손에 쥘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영의 영역에서 이 자유의지는 다른 영적인 존재에 영향을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극단적으로 치달아 갈 때에 '빙의' 즉 '마귀 들림'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천사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 공식적인 가르침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저 성경에 등장하는 가브리엘, 라파엘, 미카엘 천사에 대한 것과 우리 각자에게 수호 천사가 존재한다는 것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 천사들이 하느님의 메신저 역할을 하고 있으며 우리를 선의 길로 이끌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한다는 정도입니다. 따라서 이를 뒤집으면 마귀가 하는 역할이 나오게 됩니다.
마귀는 영적으로 타락한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그 마귀들은 인간을 악의 길로 이끌려고 합니다. 천사들이 자신들 마음대로 우리를 '조종'하지는 못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마귀들도 마음대로 우리를 조종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잡고 있는 운전대를 우리 스스로 넘겨주면 결국 그들은 우리를 파고들어 우리를 조종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현실 안에서도 벌어지는 일입니다. 타인에게 조종당하는 인간이 있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심각하게 마귀들린 사건이 아니라 조용한 일상에서도 벌어지는 일입니다. SNS 상에 챌린지를 따라한다며 멍청한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소중한 존재를 조금씩 타인에게 맡겨서 결국 타인의 의지가 자신에게 작동하고 있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또 흔히 말하는 가스라이팅이라는 것에서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생각과 의지를 타인이 하는 말에 내어맡겨 결국 나도 모르게 상대가 원하는 것을 충실히 실행하고 있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중독도 마찬가지로 조금씩 자신에게 허락되는 쾌락을 뒤쫓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의지에 좌지우지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단순한 '심리'의 문제이기보다 더러운 영의 영향력과 연계된 문제입니다.
마귀는 여전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사로잡아 자신과 그 주변을 고통스럽게 만들고자 애를 씁니다. 의외로 해결 방법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마귀 들린 딸을 어떻게 해방시킬까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건 고민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지 하나 필요했던 것은 '여인의 믿음'이었습니다. 마귀는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지닌 이 앞에서 무력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예수님의 자비를 끌어오기 때문이고 하느님의 권능을 얻게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권능 앞에 마귀는 무력합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의 믿음을 확인하는 바로 그 순간에 여자의 딸이 나아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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