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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모세




지상에서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았을 때에 마음 속에 하느님이 없는 이에게는 재앙이 되지만 의인에게는 오히려 훈련이 됩니다.


모세는 결국 땅에 들어서지 못하고 그곳을 바라만 보고 죽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생각에는 모세가 마치 저주받은 존재처럼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바라던 것을 이루지도 못했으니 실패한 것이고 하느님의 축복에서 배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모세가 진정으로 가고 싶은 곳은 그 땅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그 땅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모세가 추구했던 것은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뜻을 모세는 마지막까지 이루어 낸 것입니다.


사실 이 가르침이 전하는 내용은 조금은 심도가 깊은 내용입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나 전해져서는 안됩니다. 물론 아무에게나 전해진다고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잡음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모세가 가야할 땅이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세상의 땅따먹기에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이였습니다. 하라 하면 하고 멈추라 하면 멈추는 이였지요. 그래서 모세는 가라 해서 백성을 이끌고 나왔고 가지 말라 해서 그 땅에 들어가지 않은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영적 땅을 결코 상실한 적이 없는 셈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여호수아가 그 땅에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수월하게 풀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수많은 싸움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는 오히려 그 땅에 들어서지 않는 것이 속시끄러움을 그나마 덜 겪는 일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남미에서 일하는 동안 사람들은 제가 처한 현실을 염려해 주셨습니다. 그 험한 땅에서 어떻게 지내느냐고 빨리 들어오셔야 하지 않느냐고 걱정에 걱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한국 땅에서 사목을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한국 땅에 들어와서 남미에서의 고충이 사라졌을까요? 환경은 분명 나아졌습니다. 남미에서 겪던 벌레도 없고 성전은 깨끗하고 정돈되어 있으며 사람들의 배움의 수준도 높아서 글을 모르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모두 '적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한국에서는 남모를 '영적 투쟁'이 시작됩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교만과 아집으로 닫혀 있고 현세적인 욕구에 사로잡혀 도무지 벗어날 줄을 모릅니다. 내면이 얼마나 바쁘고 복잡한지 영원한 가르침에 헌신할 여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국에서 영혼의 투쟁의 강도가 더 심해진 셈입니다. 사람이 단순한 일에 헌신할 때에는 오히려 생각이 맑아지는 법입니다. 하지만 한국이라는 영적 지형은 보다 복잡하고 음흉하기까지 합니다. 즉, 성당에서 드러내는 모습과 일상에서 사는 모습이 전혀 다른 사람들을 마주해서 사목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복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 (신명 34,10)


약속된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하나의 사실만으로 모세를 식별하려고 하다가는 너무나 그릇된 식별을 하고 맙니다. 모세는 더할나위 없이 훌륭한 예언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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