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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을 꾸미다




의인을 기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의인이 살아갔던 뜻을 고스란히 이어 받아 오늘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의인이 입었던 옷을 입고, 그 의인이 머물렀던 곳에 살며, 같은 외적 생활방식을 유지한다고 해도 정작 그 의인의 삶을 닮지 못하고 악을 저지르면 소용없는 일이 됩니다. 마치 성소주일에 어떤 말썽쟁이 꼬맹이가 수단을 입었다고 해서 그가 신학생이 되는 것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가장 본래적인 의미의 성지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활동하시고 돌아가신 곳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과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한국에도 성지가 수두룩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따라 살겠다고 하다가 피를 흘리며 죽어간 한국의 순교 성인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취지는 당연히 순교자의 삶을 본받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취지대로 이루어지고 있을까요?


사실 한국의 성지 개발을 순진한 눈으로 봐 주기엔 조금은 곤란한 면이 있습니다. 당장 본당마다 이루어지고 있는 성지 순례를 관찰해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본당도 조만간 성지순례를 가겠지만 그 성지 순례라는 것이 진정으로 성지를 순례하는 것인지, 아니면 성지 순례를 빌미로 해서 소풍을 다녀오는 것인지는 사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성지 역시도 비슷한 취지로 개발되고 있는 셈입니다. 정말 순교 신앙의 발자취를 따라서 사람들이 그것을 느끼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도록 개발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수많은 본당 소풍 계획의 일환으로 나들이 갈 곳을 개발하고 있는 것인지는 잘 성찰해야 할 부분입니다.


사실 오늘날 다른 소풍의 기회는 많습니다. 헌데 굳이 성당에서 하는 성지순례까지 여느 소풍과 똑같은 것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이 합당한 일일까요? 교회는 조금씩 세상에 양보해왔고 어느새 세상과 똑같아져 버렸으며 이제는 세상보다 더한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가 짠 맛을 잃으면 거리에 버려져서 사람들에게 짖밟히는 법입니다.


예수님과 교회의 수많은 성인들, 그리고 우리나라의 순교 성인들은 신앙 때문에 현세의 좋은 것들을 빼앗겨 왔습니다. 역으로 그들을 박해한 이들은 현세의 좋은 것을 누리기 위해서 신앙을 지키려는 이들을 박해해 왔습니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순교 성지들이 정말 신앙을 활성화해서 사람들을 신앙의 투사로 만들려는 것인지 아니면 더 편하고 더 안락하고 더 쾌락적이고 더 유흥적인 것을 양산하기 위한 도구로 쓰이는 것인지 반성할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의 메세지는 너무나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마태 23,29-32)


훗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내면에 형성되어 가는 것을 바라보실 것입니다. 그리고 저마다 자신의 자리에서 올바로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성지순례들은 진정 신앙을 함양하는 과정일까요? 아니면 신앙이라는 이름을 팔아서 다녀오는 세속적 즐거움의 잔치일까요?


공식적인 자리에서 거듭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 초전본당의 성지순례는 조금은 달랐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사제이자 영적 아버지로서 여러분에게 드리는 권고를 잘 수용한다면 다음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함께 묵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아버지가 자녀들을 대하듯 여러분 하나하나를 대하면서, 당신의 나라와 영광으로 여러분을 부르시는 하느님께 합당하게 살아가라고 여러분에게 권고하고 격려하며 역설하였습니다. 우리는 또한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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