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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에 등장하는 참된 교회의 이미지를 분석하다




이사야서는 그 내용을 살펴보면 굉장히 살벌합니다. 교회의 여러 타락상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종의 모습을 다룬 예언서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그 가운데 교회의 바람직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다 - 실존적인 교회

교회는 공정이 이루어지고 정의가 실현되어야 하는 곳입니다. 하지만 이는 다른 누가 대신해 주어서 교회 안에 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교회에 참여하는 우리들이 지키고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를 망각하고 흔히 교회에 실망했다고 하면서 교회를 떠납니다. 교회 안에 생각처럼 공정과 정의가 없다는 이유를 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공정과 정의의 실현의 주체는 추상적인 어떤 존재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영역에서부터 공정과 정의를 구체적으로 실현해 나가야 합니다.


구원이 가까이 왔고 의로움이 드러나리라 - 희망의 교회

우리는 현세를 목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현세에서 성실하게 살고 심지어 희생까지 하는 이유는 다가올 영원의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현세에서는 오히려 손해를 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하고 성실히 살아도 우리는 박해받을 수 있고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공정과 정의를 지키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진정한 목적지는 언제나 영원에 두고 우리는 희망의 가치를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며 주님의 종이 되려고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들,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않고 나의 계약을 준수하는 모든 이들 - 사랑의 교회

앞서 공정과 정의라는 가치가 있지만 그 가치의 가장 근간에는 결국 '주님'이 있습니다. 우리는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뒤따르려고 애쓰는 이들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구성원들의 기본 조건입니다. 심지어는 '이방인들'도 주님을 따르기만 한다면 절대로 배제되지 않습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은 외적 자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내면으로 온전히 일치하고 하나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천주교 신자라도 내면적으로 하느님에 대한 일치와 사랑이 없다면 그는 결국 주님의 나라에 받아들여지기 힘들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은 교회 구성원이 아니라도 그 내면에 하느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존재한다면 그들의 구원에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이 내리신 당신의 계명과 계약을 성실하게 지키게 됩니다. 그 계명은 형식적이고 율법적 틀이라기 보다 참된 의미의 사랑입니다.


나는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고 나에게 기도하는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리라 - 배움의 교회

우리는 신자가 되는 순간 멈추어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평생을 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길이 열립니다. 성경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영혼의 여정을 산을 올라가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예수님도 곧잘 기도하시기 위해서 산으로 가시곤 하셨습니다. 산은 오르는 데에 힘겨운 곳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오르고 나면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정상에서의 상쾌하고 시원한 체험은 산을 오르는 보람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일상에서도 하느님을 따라 성실하고 꾸준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산을 올라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의 집에서 누리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세속의 쾌락에 젖어서 바닥을 기어다니는 사람들은 성화의 체험의 기쁨을 절대로 누릴 수 없습니다. 그들은 곧잘 성실한 삶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비아냥대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산을 직접 올라본 사람이라면 그 여정을 가고 있는 이들에 대한 진심어린 존경이 우러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여정의 마지막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쾌락과는 차원을 달리합니다. 이 기쁨은 영혼의 성화에서 오는 진정한 안정감과 보람입니다.


그들의 번제물과 희생 제물들은 나의 제단 위에서 기꺼이 받아들여지리니 - 희생의 교회

하늘 나라의 기쁨을 맛 본 이들은 이 기쁨을 더욱 증진시키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번제물과 희생 제물을 바치기 시작합니다. 무언가 돈을 갖다 바치거나 엉뚱한 것을 교회에 바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바로 자신의 의지를 온전히 하느님 앞에 내어놓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그런 그들의 영혼을 기쁨의 번제물과 희생 제물로 받아들여 일을 시작합니다. 가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가정 안에서, 사회의 특정 영역에 속한 사람이라면 그 영역에서 하느님은 자신을 바치는 이들을 통해 당신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낮춰지고 겸허한 마음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진정한 제물입니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 - 기도의 교회

기도라는 행위는 현실성을 넘어서는 행위입니다. 사실 현실을 살아가는 데에 '기도'라는 것은 그 어떤 구체적인 역할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간과 노력을 빼앗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초자연'과 맞닿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기도는 진실로 소중한 행위가 됩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만남의 시간이며 그분에게서 '은총'이라 불리는 초자연적인 힘을 얻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거처, 즉 진정한 성전은 바로 기도를 위한 집이 됩니다. 그리고 그 거처는 물리적인 특정 건물의 공간이 아니라 바로 성령께서 머무르시는 우리 자신이 성전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우리는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고 앞서 서술한 교회의 특징이 되는 모든 일들을 성실하고 책임감있게 수행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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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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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