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은 운동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지식은 정보로 쌓을 수 있지요. 감정은 관람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신앙도 어떤 것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체험'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신앙은 민족의 체험을 기반으로 하고 신약은 제자들의 체험을 기반으로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우리도 '체험'이 필요합니다. 이 체험은 단순한 '기술 습득'을 위한 행위의 반복이 아니라 보다 넓고 광범위한 의미의 '전인적인 체험'을 의미합니다.
올바른 체험을 위해서는 알아야 하며, 느껴야 하고 그렇게 알고 느끼는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전인적인 면으로 이 신앙의 체험을 합니다. 예를 들어 악마들은 예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위엄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아는 것을 절대로 실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존재를 알고 그분의 존엄함을 안다면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명해야 하지만 그들은 반항하는 선택을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 각자의 고유한 체험을 기반으로 합니다. 이 체험을 위해서는 올바른 신앙을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물론 신앙을 속속들이 그 교리적인 내용을 알아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사람의 내면에는 하느님께서 심어 놓으신 최초의 앎이 이미 자리하고 있으니 그것을 우리는 '양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무엇이 옳은 일인지 무엇이 나쁜 일인지 선천적으로 알고 느낍니다. 그러나 이 앎은 우리의 성장과 더불어 증진될 수도 있고 감퇴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더 참되고 올바른 앎을 향해서 나아가야 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해서 나의 경험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성인들이 우리와 남다른 자질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인물들 속에서 수많은 죄와 약함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느님을 끝까지 신뢰했고 그분을 향한 믿음을 키워 나가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체험을 해 본 사람은 그 과정과 결과를 잘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 체험을 바탕으로 더욱 헌신의 삶에 열중하게 됩니다. 반대로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의욕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더욱 위축되게 되고 따라서 자연히 '체험'이 없는 이성적이고 순수 사고적인 신앙으로 빠져 버려 흥미를 잃게 됩니다.
가난한 이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보는 이와 그 상황을 머릿속으로만 그리면서 '그렇게 하면 그들이 그 돈으로 칼을 사서 나쁜 짓을 할 거야'라고 생각만 하는 이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구체적인 체험으로 바꾸어 갈 때에 심지어 우리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보기까지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이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체험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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