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로마 11,33)
순명이라는 가치는 참으로 힘든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원하는 걸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헌데 순명이라는 것은 나의 의지를 다른 존재에게 내어주어 내가 원하건 말건 상관없이 내가 순명하는 대상이 원하는 것을 나를 통해 이루는 것이기에 절대로 쉽지 않은 것입니다.
사제나 수도자는 이 순명 서약을 합니다. 자신의 장상, 즉 주교나 수도회 장상에게 순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인사人事는 세상의 통상적인 것과는 전혀 다르게 이루어집니다. 원한다고 더 오래 있는 것도 아니요 싫다고 떠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장상이 가라 하면 가야 하고 오라 하면 와야 합니다. 순명하는 것이지요.
이 순명은 때로는 어리석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순명하는 대상은 하나의 인간이고 오류를 지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우리의 합리성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결정이 내려지기도 하고 말도 안되는 지시가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지혜가 필요합니다. 순명의 근본에는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신의 장상에게 순명하는 이들은 그 장상의 인간됨에 순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장상으로 준 하느님에게 순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거의 모든 경우에 순명은 지켜져야 합니다. 나의 합리성을 벗어나는 명령이라도 일차적으로는 지켜져야 합니다.
하지만 당연히 예외가 존재할 수는 있습니다. 죄가 되는 일을 순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가 되지 않는 선에서는 아무리 어리석어 보이는 일이라도 순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당신을 광야로 보내는 성령의 의지를 기꺼이 수행했고 자신에게 수난의 잔을 마시게 하려는 아버지의 뜻을 기꺼이 순명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마태 4,1)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마르 14,36)
사실 우리는 아닌 듯 보여서 순명에 저항하기보다 그 뜻을 따르기 싫어서 아닌 이유를 찾아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순명은 우리의 영혼에 훌륭한 훈련 도구가 됩니다. 하느님 앞에 겸허한 영혼이 되는 데에 순명만큼 좋은 훈련은 없습니다. 특히나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삶의 풍요로움 가운데에 더욱 나 자신의 의지를 섬기려고 하는 유혹에 쉽게 빠져들곤 합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올바른 순명의 영혼을 지닌 이는 보물과 같은 사람입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로마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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