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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를 위한 자선




영혼의 양은 외적으로 쉽게 분별되지 않습니다. 단적인 예로 가난한 과부의 렙톤 두 닢이 있습니다. 과부가 바친 것의 실질적인 액수는 턱없이 적은 것이지만 그 과부는 다른 누구보다도 많은 것을 바쳤다고 예수님은 과부를 칭찬하십니다. 심지어는 거룩해 보이는 일에 관해서도 비슷한 기준이 적용됩니다. 성전 앞에 나서서 으스대며 자신의 종교적 헌신을 말하는 바리사이보다도 뒤에서 스스로의 삶을 반성한 세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더 많은 은총을 얻는 법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외적으로 측정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는 지역도 등급이 있어서 더 비싸고 좋은 아파트에 사는 아이과 임대 아파트에 사는 아이가 서로 비교되는 세상입니다. 실제 제가 사목하던 한 지역의 유치원에서 두 아파트의 아이를 서로 분리시켜 교육시켜야 하지 않느냐고 하는 학부모의 건의가 들어왔다는 소리를 듣고 안타까움을 느낀 적도 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높은 것과 낮은 것을 구분해 두었습니다. 즉 많고 적음의 외적 틀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연봉의 많고 적음, 비용의 많고 적음 우리는 이런 외적인 구분점에 익숙하게 살아옵니다. 헌데 코린토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하지만 이를 세상의 기준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영원의 세상에서 많고 적음의 측정은 외적인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영적인 면에서는 앞서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가난한 과부의 렙톤 두 닢이 '더 많은' 헌신으로 구분됩니다.


영혼의 영역에서는 '진심을 쏟는 것', '더 헌신하는 내면의 영역'이 더 소중한 가치로 존중받게 됩니다. 그래서 묵주기도를 몇 단을 바쳐야 하는가 하는 것보다 얼마나 신실한 마음으로 얼마나 간절하게 바치는가 하는 것이 더 소중한 일이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많은 것을 헌신할 듯 하지만 실질적인 헌신의 영역에서 우리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바로 '자선'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위신이 서는 곳에는 거침없이 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면 돈은 나가지만 명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난한 이를 위한 자선이야말로 하느님에 대한 그의 본심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나에게 그 어떤 것도 돌려줄 수 없는 가난한 이를 위해서 어떤 헌신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기초로 해서 드러나는 숨길 수 없는 부분입니다.


제가 보좌 신부 때에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신부님, 제가 나중에 5억 벌면 1억 성당에 쾌척하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지금 가진 돈에서 일부를 구체적으로 내어놓는 데에 마음쓰지 않는다면 훗날 5억을 벌든 10억을 벌든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지금 가진 만원에서 천원을 내어놓기를 아까워한다면 가진 돈이 늘어날수록 탐욕은 더욱 커져만 갈 뿐입니다.


올바른 자선을 위해서는 굳건한 신앙이 필수적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적인 면에서 자선은 '상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앙 안에 서 있는 사람은 자선의 영적인 면을 압니다. 무엇보다도 그 근거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내어놓는 것의 내적 가치를 알고 계십니다. 세상에 그냥 버려지는 자선은 하나도 없습니다.


남미에서 길에서 마주하는 이들에게 적선을 할 때면 언제나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께 디오스 레 빠게(Que Dios le pague.)"

이 말의 의미는 '하느님께서 갚아 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되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넘치고 흐르도록 은총으로 안겨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주니 그의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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