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도 종종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저희 성당 마당에 주차를 하는 신자 아닌 분들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건네면 비슷하게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이 성당 출신 누구누구 신부를 잘 안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요?
단순하게는 자신이 성당과 가까운 관계에 있으니 내가 신자는 아니지만 성당에 차를 대는 것을 가지고 뭐라 하지 말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 누구누구 신부의 얼굴을 봐서라도 나를 좀 알아봐 주라는 것이겠지요. 누군가와 아는 것이 일종의 '권력'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힘있는 사람들과의 연줄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상 안에서 어떻게든 그 힘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권력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주는 매력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나무들이 임금을 세우는 비유가 등장합니다. 하지만 올리브나무도, 무화과나무도, 포도나무도 모두 자신이 지니고 있는 달란트를 포기하면서 '엉뚱한 일'에 매진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가시나무가 그 적임자가 됩니다.
이는 권력의 특징을 잘 표현해 냅니다. 권력가들은 힘을 과시하는 것 말고는 다른 특별한 재주를 지니지 못한 이들인 셈입니다. 권력을 쥐고 그것을 표출하는 데에서 만족감을 얻는 것이 그들이 거기에 집착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래서 권력의 특징은 남을 내리누르는 데에서 오는 만족감입니다. 그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든 은근히 표현하든 마찬가지입니다. 권력은 그것을 쓰기 위해서 쥐는 것입니다.
반대로 복음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보여 주십니다. 이는 단 한 마디로 축약됩니다.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하느님은 당신의 무한한 권력을 자비를 표현하는 데에 쓰십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그 무한히 자비로운 권력 행사에 혜택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여주시지 않고 용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없을 테니까요.
세상의 권력 다툼은 비굴하면서도 추악합니다. 그리고 권력을 쥐기 직전까지는 온갖 좋은 모양새를 드러내지만 결국 권력을 쥐고 나면 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과는 달리 하느님의 권능은 자비를 기반으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권위를 닮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짖누르고 억누르는 권력이 아니라 기꺼이 봉사하고 헌신하는 권위로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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