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나 수도자라고 다 하느님 생각만 한다고 착각하지 말아라.
우리 역시도 미천한 구원의 대상일 뿐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며,
또한 내 주변을 바라보며 하는 말이다.
신앙을 무엇으로 분별해 낼 수 있겠는가?
그가 내뱉는 말은 기준이 될 수 없다.
마귀도 예수님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한다.
지금 당장이라도 마르꼬 복음 5장을 펴서 귀신들린 이가
예수님을 앞에 두고 뭐라고 부르짖는지 들어보라.
꾸며진 말, 우리의 지성에서 나오는 말은 우리의 신앙을 보장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의 옷, 수단이나 수도복이 그의 신분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하느님의 사람은 다름아닌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럼 '하느님의 일'이 뭐냐고 물을거다.
ㅎㅎㅎ
뭐가 하느님의 일일까?
성당 안에서 하는 건 다 하느님의 일일까?
그럼 예수님이 상인들을 쫓아내진 않았을테지...
제대 가까이 일하면 하느님의 일인가?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회당에서 왜 그리도 예수님을 미워했던지.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의 마음으로 하는 일을 말한다.
'하느님의 마음'은 뭘까?
그건 명백하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를 원하신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 사랑을 받아들이기를 바라신다.
이 얼마나 쉬운 일인가?
헌데 웃기는 게,
'하느님이 안보인다'는 거...
그 사랑이라는 걸 현세적인 재물로 좀 주시면 당장 알아 듣겠는데,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질 않는다.
하느님은 우리가 상상하는 미천한 사랑이 아니라
더욱 위대한 사랑을 선물하려고 하시기 때문이다.
당신 사랑의 극치는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이었다.
이 즈음에서 따라읽던 사람들은 조금 '뻥~'쪄야 한다.
사랑이라면서 왜 죽인데?
그게 무슨 사랑이야?
사랑하면 잘 해줘야지.
잘 보듬고 잘 보살펴야지.
왜 죽이고 난리야?
왜 자꾸 '희생'을 강요해?
그렇다...
우리의 좁은 머리로는 이해가 안된다.
그래서 '신앙의 신비'라고 교회도 얼버무린다.
하지만 사랑해본 사람은 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죽을 각오를 해 본 사람은,
그 '사랑'을 안다.
헌데 우리는 그런 하느님의 사랑을 이해 못해서,
그저 우리 선에서 사랑만 찾아 다니고 있다.
좀 주고 좀 받는 그런 저급한 사랑.
내가 네 이야기를 한 시간 들어줬으니
너도 내 이야기를 한 시간 들어야 한다는 그런 사랑,
우리에겐 너무 익숙한 '현금거래' 사랑이다.
그냥 주는 연습을 좀 더 해야한다.
그러다보면 나중엔 그냥 준 게 그냥 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냥 줬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돌아오기 시작할 때에
그것도 100배로 돌아오기 시작할 때에 알게된다.
그게 하느님의 사랑이었다는 걸.
결국 신앙은 그런 내어줌이고,
신앙은 헌신이며,
신앙은 희생이고,
신앙은 참 사랑이다.
나도 마귀들린 사람처럼 말은 잘 하는구나.
이제 나가서 말한 바를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