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복음 12장
소작인의 비유는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한 비유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그토록 아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고 또 반대로 그런 사랑에 말도 안되게 거부를 행사하는 우리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 비유만 머릿속에 넣고 있어도, 실상 성경의 모든 내용의 핵심 줄기를 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집짓는 자들이 버린 돌이라는 의미는 우리가 일상 안에서 평소 변변치 않게 생각했던 것을 말합니다. 기도, 그걸 도대체 해서 뭘 하는가? 미사는 주일만 가면 되지, 영적인 삶? 지금 당장 먹고 사는 게 걱정인데 신앙이 밥먹여 주는가? 이런 말들을 달고 사는 사람이나 아니면 성당에는 오고 성당 활동은 하더라도 늘 이런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신앙', '하느님' 또는 '예수님'은 그야말로 부차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전혀 세상 살이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주변적인 존재로만 인식되어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들에게 신앙은 마치 보험에 들듯이 먼~ 훗날 언젠가 다가올 죽음을 위해서 마련해 놓은 안전장치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마구 대하던 돌이 훗날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때에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을 부실하게 생각해 왔던가 하는 것이 들통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영원의 건축물을 짓기 시작하기 위해서 머릿돌을 쓰려고 찾아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도대체 어디에다 버렸는지 어떤 모양인지도 모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황제에게 내는 세금"에 관한 일화에서는 아주 유명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흔히들 착각하기 쉽습니다. 돈은 국가에게 신앙은 하느님에게라는 식의 이분법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아닙니다. 사실 하느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세상 모든 것들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에게는 하느님에게 더 합당한 것을 내라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주머니에 든 돈 몇 푼을 받고 기뻐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하느님은 보다 상위의 것, 즉 '우리의 마음'을 기다리십니다. 이 장의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의 모든 것, 하느님은 그 마음을 기다리십니다.
부활에 대해서 사람들은 많은 곡해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지닌 채로 살아가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천사처럼 되어 이런 저런 구분들이 모두 소용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현세에 지닌 모든 것들과 모든 인간관계는 우리의 한계성 속에서 서로들 도와주라고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마치고 나서 새로이 접어들게 될 부활의 삶 안에서는 이런 구분들(인간관계, 심지어는 가족마저도)이 무색해지게 될 거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이가 모든 이에게 서로의 마음을 열고 무한히 사랑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주 하느님은 '죽은'이들의 하느님, 수동적이고 정해진 틀에 의해 살아가며 제한적인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능동적이고 활력이 있으며, 성령에 의해 자유롭고 무한한 하느님이십니다. 사실 이런 말을 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할 많은 분들이 있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도 달리 설명할 길은 없고 저 역시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바입니다.
가장 큰 계명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 우리에게 주어진 그 어떤 계명을 가지고 오더라도 이 큰 두 줄기에서 제외될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규율을 지킨다고 사람을 미워하는 이들이 적지 않아서 안타깝습니다. 빈대잡겠다고 초가삼간 태우는 꼴입니다.
예수님의 세상 안에서에 대한 위치를 율법학자들이 걸고 넘어집니다. 이 역시도 우리의 고정된 사고 안에서 빚어지는 한계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역사, 계승, 전통이라는 그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우리 주님을 인간의 산물에 집어 넣으려는 시도가 가지는 한계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주님이지 다윗의 후손이 될 수 없습니다. 결국 유다인들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었지만, 지금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 선택을 물려받았습니다. 우리는 유다인이 아니지만 하느님의 약속을 물려 받았기에 그 약속을 잘 지켜나가야 합니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우리가 그 약속을 저버리면 하느님께서는 언제라도 지금의 우리를 저버리고 다른 민족을 일으키실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율법 학자들의 위선은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다만 우리는 함부로 그렇게 보이는 이들을 우리의 잣대로 함부로 심판할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에 우리 자신들의 마음부터 바라보아야 합니다. 위선적인 마음으로 짐칫 거룩한 척 하는 이들이 되지 않도록 언제나 진실하고 솔직하게 모든 이들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앞서 말했듯이 하느님께서 무엇을 더 즐기시는 가를 극명하게 드러내줍니다. 하느님은 '온전함'을 바라십니다. 하느님은 '잉여적인 존재'가 되기를 원치 않으시고 우리 존재의 중심에 튼튼히 자리잡기를 바라십니다.
소작인의 비유는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한 비유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그토록 아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고 또 반대로 그런 사랑에 말도 안되게 거부를 행사하는 우리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 비유만 머릿속에 넣고 있어도, 실상 성경의 모든 내용의 핵심 줄기를 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집짓는 자들이 버린 돌이라는 의미는 우리가 일상 안에서 평소 변변치 않게 생각했던 것을 말합니다. 기도, 그걸 도대체 해서 뭘 하는가? 미사는 주일만 가면 되지, 영적인 삶? 지금 당장 먹고 사는 게 걱정인데 신앙이 밥먹여 주는가? 이런 말들을 달고 사는 사람이나 아니면 성당에는 오고 성당 활동은 하더라도 늘 이런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신앙', '하느님' 또는 '예수님'은 그야말로 부차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전혀 세상 살이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주변적인 존재로만 인식되어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들에게 신앙은 마치 보험에 들듯이 먼~ 훗날 언젠가 다가올 죽음을 위해서 마련해 놓은 안전장치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마구 대하던 돌이 훗날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때에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을 부실하게 생각해 왔던가 하는 것이 들통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영원의 건축물을 짓기 시작하기 위해서 머릿돌을 쓰려고 찾아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도대체 어디에다 버렸는지 어떤 모양인지도 모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황제에게 내는 세금"에 관한 일화에서는 아주 유명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흔히들 착각하기 쉽습니다. 돈은 국가에게 신앙은 하느님에게라는 식의 이분법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아닙니다. 사실 하느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세상 모든 것들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에게는 하느님에게 더 합당한 것을 내라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주머니에 든 돈 몇 푼을 받고 기뻐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하느님은 보다 상위의 것, 즉 '우리의 마음'을 기다리십니다. 이 장의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의 모든 것, 하느님은 그 마음을 기다리십니다.
부활에 대해서 사람들은 많은 곡해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지닌 채로 살아가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천사처럼 되어 이런 저런 구분들이 모두 소용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현세에 지닌 모든 것들과 모든 인간관계는 우리의 한계성 속에서 서로들 도와주라고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마치고 나서 새로이 접어들게 될 부활의 삶 안에서는 이런 구분들(인간관계, 심지어는 가족마저도)이 무색해지게 될 거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이가 모든 이에게 서로의 마음을 열고 무한히 사랑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주 하느님은 '죽은'이들의 하느님, 수동적이고 정해진 틀에 의해 살아가며 제한적인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능동적이고 활력이 있으며, 성령에 의해 자유롭고 무한한 하느님이십니다. 사실 이런 말을 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할 많은 분들이 있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도 달리 설명할 길은 없고 저 역시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바입니다.
가장 큰 계명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 우리에게 주어진 그 어떤 계명을 가지고 오더라도 이 큰 두 줄기에서 제외될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규율을 지킨다고 사람을 미워하는 이들이 적지 않아서 안타깝습니다. 빈대잡겠다고 초가삼간 태우는 꼴입니다.
예수님의 세상 안에서에 대한 위치를 율법학자들이 걸고 넘어집니다. 이 역시도 우리의 고정된 사고 안에서 빚어지는 한계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역사, 계승, 전통이라는 그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우리 주님을 인간의 산물에 집어 넣으려는 시도가 가지는 한계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주님이지 다윗의 후손이 될 수 없습니다. 결국 유다인들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었지만, 지금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 선택을 물려받았습니다. 우리는 유다인이 아니지만 하느님의 약속을 물려 받았기에 그 약속을 잘 지켜나가야 합니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우리가 그 약속을 저버리면 하느님께서는 언제라도 지금의 우리를 저버리고 다른 민족을 일으키실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율법 학자들의 위선은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다만 우리는 함부로 그렇게 보이는 이들을 우리의 잣대로 함부로 심판할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에 우리 자신들의 마음부터 바라보아야 합니다. 위선적인 마음으로 짐칫 거룩한 척 하는 이들이 되지 않도록 언제나 진실하고 솔직하게 모든 이들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앞서 말했듯이 하느님께서 무엇을 더 즐기시는 가를 극명하게 드러내줍니다. 하느님은 '온전함'을 바라십니다. 하느님은 '잉여적인 존재'가 되기를 원치 않으시고 우리 존재의 중심에 튼튼히 자리잡기를 바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