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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7장 8장


마르코 복음 7장, 8장

사실 복음의 다른 두 장을 하나의 주제로 통일해 본다는 것은 좀 쉽잖은 일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활동의 시작과 끝으로 감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진행을 살펴볼 수는 있다.
7장과 8장은 이제 아이가 걸음마를 배워서 길을 걷고 이제 산등성이를 조금 오르기 시작하는 모습과 같다.
가르침은 계속되어 이제는 보다 현실적인 주제를 다룬다.
율법과 그 근본정신이다.
이교 여인의 치유 이야기는 살짝 끼어든 양념과도 같고,
기적으로는 귀머거리 벙어리의 치유 이야기,
빵의 두 번째 기적,
베싸이다의 장님이 나온다.
그리고 베드로의 고백과 더불어 그를 향한 꾸짖음,
이어 예수님의 본격적인 십자가의 가르침이 나온다.

제자들이 잘 따라와야 할텐데...
예수님의 마음이 어땠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중간 중간 나오는 한탄으로 봐서 좀 답답하시긴 하셨나 보다.

제자들은, 우리들은 아직도 '빵' 걱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7장과 8장을 잘 따라온 이들은,
예수님의 사탕에서 벗어나서 보다 본격적인 가르침으로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따라오지 못한 이들은
이제부터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질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물론 우리들이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서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겠지만,
실상 이거야말로 가장 위험한 상태이다.

7장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은 "껍데기의 허상"에 대해서 가르친다.
이는 벌써 앞서 다뤄온 주제로,
무엇이 더 본질적인가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인데,
앞서는 약하게 드러났다면,
이제는 본격적으로 가르침 안에서 이를 고발하기 시작한다.

'율법주의'는 껍데기이다.
'법 규정 말마디 하나하나를 잘 지키자!'는 분명한 껍데기이다.
예수님은 당시에 실제로 일어나던 일들을 분명하게 꼬집으며 말씀을 건네신다.
규정을 지킨다며 본질을 왜곡하는 이들에 대한 고발이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지위에 있었던 바리사이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엇나간 마음을 꼬집는다.
오늘날로 치자면,
교회 규정 지킨다고 살아있는 사람을 숨통 터지게 하는 일들이다.
뭐가 있을까?
교회 건축 기금은 엄청 거두면서 소외받는 이들은 천시하는 모습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이건 하나의 예시에 불과하다.
이 정도만 하고 넘어가자.
현실에 대한 비판은 내가 몸소 보여주지 않고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말보다는 내가 몸소 실천해 보이도록 노력할 생각이다.

중간에 끼어있는 이방 여인에 대한 것은
'겸손'의 가치를 일깨우기 위함이다.
겸손은 하느님의 뜻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이다.
마치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 들어가듯이
하느님의 사랑은 가장 낮은 곳, 스스로 낮아지는 곳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는 짐짓 겸손한 체하는 거짓 겸손이 아니라,
진정 스스로를 하느님 앞에서 낮은 자로 인식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창조주 앞에 놓인 피조물의 지위를 기억하는 자,
이런 사람이 진정한 겸손을 아는 자이다.

귀머거리 벙어리의 기적 이야기는 예수님의 치유 방법을 극명히 드러내어 준다.
예수님은 무언가를 이루실 때에 상대에게 필요한 걸 분명하게 드러내시는 분이시다.
평소에는 말 한 마디로도 사람을 죽음에서 일으키시는 분이시지만,
귀머거리 벙어리에게는 '치유를 느끼게 해 주는 일'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서 귀에 손가락을, 혀에 침을 바르셨다.

두 번째 빵의 기적을 통해 또 한번의 은총의 넘쳐남을 보여주신 예수님이건만,
사람들은 눈에 드러나는 표징을 원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빵 걱정을 한다.
예수님은 제발 눈을 열고, 격식, 거품, 외견, 보이기, 이 현세 자체의 허상에 눈을 뜨라고
제자들에게 당부에 당부를 하신다.
하지만 제자들은 빵 걱정 뿐, 이해를 하지 못한다.
ㅎㅎㅎㅎㅎㅎㅎ
우리라고 다를 건 없다.
직장, 대학, 돈, 외모, 먹거리, 건강, 유행...
언제 한 번 하느님에게 온 마음을 다한 진실한 예배를 드리고 싶은 갈망을 느낀 적이나 있었던가?
하느님을 향한 모든 것을 내어바치는 기도보다도,
유행가가 울려 퍼지고 있는 요즈음이다.
그게 우리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영을 먼저 보살피시는 분이시다.
베싸이다의 소경의 영의 눈을 먼저 열어주시고는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니,
'걸어다니는 나무통'이 보인댄다.
그러니 예수님이 그 마을로는 들어가지 말라신다.
우리 주변의 수많은 이들이 그런 걸어다니는 나무통들이다.
뜨거운 심장이 없이,
기계적이고 순환적인 일상에 쩔어 살아가는 이들이다.
영적인 것, 기도나 성찰이나 사랑이나 자기 극복에 관심은 없고,
텔레비전 드라마가 더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부류들이다.
'걸어다니는 나무통'이다.

베드로는 저도 모르게 신앙고백을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에
그만 자신의 구세주를 꾸짖고 앉았다.
그에 마땅한 꾸중,
'사탄아 내 앞에서 물러나라'는 꾸중을 받는다.
아마 베드로는 나름 스승을 걱정하는 그 마음을 이해받지 못해 상처 받았으리라,
하지만 예수님은 일부러 제자들이 보라고 꾸짖으셨다.
베드로의 다친 마음을 아시지만,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싶으셨던 것이다.
인간의 생각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각'에 몸담으라고.

그리고 마지막 가르침인,
나를 따르려면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을 남기시고,
이 오르막길의 가르침을 마무리하신다.
생명을 잃으면 세상을 얻어도 소용이 없다.
잊지 말자.
생명을 잃으면 세상을 얻어도 소용이 없다.

진정한 죄는
하느님을 잊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다.
이 말인즉슨 그저 종교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리에 그 어떤 것도 놓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다른신은 돈이 될 수도, 나 자신이 될 수도, 명예나 취미나, 그 어떤 것이 될 수도 있다.
먼저는 하느님이다.
그리고 나머지다.
나 역시도 내 삶을 보아하니,
이걸 제대로 깨닫지 못한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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