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머거리 벙어리 이야기(주일 복음 강론)
먼저는 사람들이 데려왔다는 것에 조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이나 당사자인 그가 다가온 것이 아니다.
이는 사람들이 호기심에 데려왔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 다음의 예수님의 행동이 눈에 띈다.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예수님은 군중의 어리석은 눈길을 피하고 싶었다.
예수님이 하는 모든 기적은 하느님의 사랑을 펼쳐 보이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저 자기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있다.
예수님은 이를 피하신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나 스스로도 잘 살펴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에 하나되려고 살아가는 삶인지,
나의 인간적인 부분을 채우려고 하는 삶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늘 평화를 추구하고,
인간의 일을 하는 사람은 그 안에 숨겨진 탐욕과 이기심에
이런 저런 충돌을 경험하게 된다.
다음으로는 예수님의 행동이다.
예수님은 말씀 하나로 치유하실수 있는 분,
한 마디 말로 회당장의 딸과 나자로를 살리신 분이시다.
하지만 이번에는 방법이 많이, 아주 많~이 다르다.
귀에 손가락을 넣고 혀에 침을 바르신다.
그야말로,
"대상자 맞춤 학습법"이다.
귀머거리 벙어리가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방법으로 그에게 치유를 선물하셨다.
우리가 남을 돕겠다고 나설 때,
과연 우리는 그의 방법을 쓰고 있는지
아니면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해치워버리고 마는지를
고민하게 해 주는 대목이다.
많은 이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남에게 잘 해줬다고 생각하고는
그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잘 해주겠다는 자신의 의도를 무시한다며
도리어 화를 낸다.
내가 지켜볼 수 있는 선에서 그가 바라는 걸 보고
그것을 이루어 주어야 한다.
라면 박스 쌓아놓고 사진 찍는 건 돕는 게 아니다.
그건 다른 종류의 폭력이다.
선교지에 여러 원조는 필요하지만,
도대체 어디에 필요한지는 좀 물어봤으면 좋겠다. ㅎㅎㅎ
강론이 좀 엇나가는 기분이다.
그렇게 그는 말을 되찾는다.
듣지 못해서 말하지 못했던 그가
'먼저 귀를 열고', '그 혀를 풀어주니'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다.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되자.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말고,
들은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자.
이것이 '에파타'의 진정한 의미이다.
세상 끝까지 그분의 말씀을 전하자.
근데 그건 꿈이 좀 거창하고,
내 주변 가까운 사람들에게부터 전하기 시작하면
그게 퍼지고 퍼져 세상 끝까지 이르게 된다.
에! 파!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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