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율과 근본정신
어딜가나 정해진 규율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그 공동체 안에서 질서있게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예컨대 우리 집에 들어올때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
하지만 이 동네 볼리비아 사람들에게 이는 이상한 관습에 불과해서
무심코 신발을 신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고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고,
침착하게 이런 저런 사정들을 말해가며 가르쳐야 한다.
반면 때로는 우리 자신들도 이를 어길 때도 있다.
미사를 준비하러 급하게 나가다가 뭔가를 잊어버리고 나왔다.
그럴 때는 그걸 빨리 가져가기 위해서 신발을 신고 그냥 내 방에 들어오기도 한다.
미사 시간을 어기지 않는 것이 집안에서 신발을 신지 않는 것보다
더 소중한 가치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더 소중한 무언가를 위해서라면,
덜 소중한 것은 변화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이들이 보다 더 중요한 걸 잊고,
덜 중요한 것에 매달리는 것 같다.
하느님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라고 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는 핑계로,
'먹고 사는 게 중요하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먹고 사는 문제와는 크게 관련이 없는 걸
먹고 사는데에 끌어와 같이 걱정을 한다.
먹고 산다는 건 최소한의 인간의 존엄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가진 걸로 감사히 먹고 살아가는 것인데,
사람들은 실상은 자신의 '더 갖고 싶은' 마음을 바탕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정작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는 모양새이다.
나아가,
하느님께서 본질적으로 더 소중히 여기는 가치는,
'현세의 생명' 그 자체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희망으로 두고 살아가는 '현세의 생명'이다.
즉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을 최고로 화려하게 꾸미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최고로 꾸미기 위해서 '현세의 생명'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주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잊어버리고,
막말로,
돈 한 푼에 서로의 영혼을 더럽혀가며 싸우곤 한다.
또한 교회 안에는 이러한 규율들이 적지 않다.
전례를 예를 들어,
한 수녀님이 정성껏 준비한 제대위에 '성작수건' 하나가 부족했다.
사제는 다른 걸 모두 제쳐두고 거기에 집중을 해서 미사 중에 수녀님에게 화를 낸다.
그럼 나약한 우리 죄인들을 위해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모시기 위한 미사의 근본의미를 망각한 꼴이 된다.
그 밖에도 많은 교회의 규율들 안에는
이런 근본정신을 상실한 채로 규율에만 집중하는 모습이 적잖이 눈에 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
이 말인즉슨, 율법이 필요없다고 다 무시하고 때려 치운다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의 구절 구절 안에 담긴 보다 근본적인 뜻을 이루시려 오신 것이다.
결국 예수님이야말로 율법을 가장 제대로 잘 지킨 분이시며,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빠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진정한 분이시다.
여러분이 규율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면,
과연 그 규율의 근본정신은 무엇인가,
적어도 한 번은 고민해 보시라.
그리고 여러분이 그 근본정신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면,
그 규율을 100% 지키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너무 마음아파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로봇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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