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장
니코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다. 밤이라는 시간은 어둠의 시간이고 은밀한 시간, 비밀스런 시간이다. 니코데모가 이를 택한 이유는 드러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리를 찾고 있긴 하지만 숨겨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 단락의 마지막 말씀이 더욱 인상깊게 와 닿는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대화는 동문서답이다. 예수님은 하늘의 일을 말하고 니코데모는 인간적인 시선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고, 그분 안에서 생명을 얻어야 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멸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라는 선물을 주러 오신 분이시다. 오히려 심판하는 이들은 우리 자신들이다. 진리를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아 거짓이 되고, 빛을 받아들이지 않아 우리 스스로 어둠이 되어가는 것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에서는 이런 비유를 들 수 있겠다. 사제 한 명이 상주하는 가톨릭 성당이 있는 작은 마을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온다. 마을엔 일찍부터 모두들 가톨릭 신자였지만 그저 관습적인 것으로만 남아 있었고 사람들은 악습에 젖어 있었는데 개신교 신자들이 와서는 열심히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삶이 실제로 변화되기 시작한다. 술주정을 하던 이가 술을 끊고, 엇나가던 자녀들이 돌아오며, 두 마음을 품던 자들이 하느님에게로 온전히 자신을 봉헌한다. 이런 가운데 우리는 과연 노선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을 저주해야 할 것인가? 각자 고민해 보시라. 다만 요한 세례자의 말을 들어보자.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예수님에게는 우리편 너희편이 없다. 모두다 하느님의 자녀이고 진실과 정의를 위해서 일하는 자라면 마땅히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위와 아래라고 해서 저 위 구름이 있는 하늘을 쳐다보고 발 아래 땅을 쳐다보라는 것이 아니다. 이는 보다 참된 것과 보다 낮은 가치들에 대한 구분으로 설명할 때에 더 본질에 가까워진다. 한 마디로 이런 것이다. '돈이냐 사랑이냐?' 하지만 이 경우에 문제는 많은 이들이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겠지만 실제 삶으로는 '돈'을 더 드러낸다는 데에 있다. 이런 우리의 '본질적 삶의 태도의 선택'이 바로 이 단락에서 말하는 것이다. 입으로만 주님주님 한다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요한 복음에서 꾸준히 언급되는 것은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과 진정한 심판의 잣대를 누가 쥐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온전한 사랑이요, 우리 스스로 우리를 심판하는 꼴이라는 것이 요한 복음에서 강조되는 것이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니코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다. 밤이라는 시간은 어둠의 시간이고 은밀한 시간, 비밀스런 시간이다. 니코데모가 이를 택한 이유는 드러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리를 찾고 있긴 하지만 숨겨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 단락의 마지막 말씀이 더욱 인상깊게 와 닿는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대화는 동문서답이다. 예수님은 하늘의 일을 말하고 니코데모는 인간적인 시선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고, 그분 안에서 생명을 얻어야 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멸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라는 선물을 주러 오신 분이시다. 오히려 심판하는 이들은 우리 자신들이다. 진리를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아 거짓이 되고, 빛을 받아들이지 않아 우리 스스로 어둠이 되어가는 것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에서는 이런 비유를 들 수 있겠다. 사제 한 명이 상주하는 가톨릭 성당이 있는 작은 마을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온다. 마을엔 일찍부터 모두들 가톨릭 신자였지만 그저 관습적인 것으로만 남아 있었고 사람들은 악습에 젖어 있었는데 개신교 신자들이 와서는 열심히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삶이 실제로 변화되기 시작한다. 술주정을 하던 이가 술을 끊고, 엇나가던 자녀들이 돌아오며, 두 마음을 품던 자들이 하느님에게로 온전히 자신을 봉헌한다. 이런 가운데 우리는 과연 노선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을 저주해야 할 것인가? 각자 고민해 보시라. 다만 요한 세례자의 말을 들어보자.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예수님에게는 우리편 너희편이 없다. 모두다 하느님의 자녀이고 진실과 정의를 위해서 일하는 자라면 마땅히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위와 아래라고 해서 저 위 구름이 있는 하늘을 쳐다보고 발 아래 땅을 쳐다보라는 것이 아니다. 이는 보다 참된 것과 보다 낮은 가치들에 대한 구분으로 설명할 때에 더 본질에 가까워진다. 한 마디로 이런 것이다. '돈이냐 사랑이냐?' 하지만 이 경우에 문제는 많은 이들이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겠지만 실제 삶으로는 '돈'을 더 드러낸다는 데에 있다. 이런 우리의 '본질적 삶의 태도의 선택'이 바로 이 단락에서 말하는 것이다. 입으로만 주님주님 한다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요한 복음에서 꾸준히 언급되는 것은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과 진정한 심판의 잣대를 누가 쥐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온전한 사랑이요, 우리 스스로 우리를 심판하는 꼴이라는 것이 요한 복음에서 강조되는 것이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