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주민들은 죽은 그들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보낼 것입니다. 그 두 예언자가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묵시 11,10)
우리의 몸은 편안한 걸 좋아하고 괴로운 걸 싫어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해야 할 때가 있으니 그것을 억지로 견뎌야 할 때도 있지요. 더 나은 목적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은 그러한 뚜렷한 목적에도 불구하고 일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평안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괴로움을 겪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으로 한 걸음 나아가기 위한 움직임이지요. 하지만 모든 이가 그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자리에 머물러 버리고 맙니다.
예를 들어 고해성사때에 우리가 겪는 수치는 영혼의 괴로움입니다. 죄를 지은 것은 우리 자신들이고 우리가 저지를 잘못에 대해서 수치를 겪는 것은 그것을 극복하고 나아가기 위한 필요한 일이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수치를 피하려고 하고 최대한 수치스럽지 않은 방법으로 고해성사를 보려 합니다. 그래서 이 신부님, 저 신부님을 골라 찾아다니고 이 본당 저 본당을 옮겨다니기도 합니다.
그렇게 회피해버린 수치는 결국 우리 영혼에 도리어 독소가 됩니다. 우리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고해성사의 ‘법적 사죄’를 얻었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렇게 쉽게 얻어낸 용서는 다시 똑같이 같은 죄를 반복하는 오류에 빠져들게 만들 것입니다.
예언자는 땅의 주민들 앞에서 천상의 것을 전하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전하는 모든 말이 아름답게 여겨지지만은 않습니다. 도리어 심한 내적 고난으로 다가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예언자들은 온유와 친절과 겸손으로 애써 고통을 줄이려 노력하겠지만 근본적으로 땅의 주민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 자체를 없애 버리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아무리 꽃으로 꾸며도 십자가는 십자가인 것이니까요.
그래서 땅의 주민들은 예언자들 앞에서 괴로워합니다. 그러다가 예언자가 죽으면 그들은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기뻐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자신의 양심을 찌르는 존재가 사라졌으니 그들은 이제 회개할 여지가 없어져서 슬퍼해야 마땅함에도 그들은 도리어 기뻐하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의 죽음은 이 땅에서 비참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반드시 부활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일한 자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영원을 선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흘 반이 지난 뒤에 하느님에게서 생명의 숨이 나와 그들에게 들어가니, 그들이 제 발로 일어섰습니다. 그들을 쳐다본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두 예언자는 하늘에서부터, “이리 올라오너라.” 하고 외치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원수들이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묵시 1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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