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카 21,18-19)
하느님의 약속은 우리의 실제 머리카락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머리카락은 잃을 것입니다. 이미 대머리이신 분들, 탈모가 진행되시는 분들은 머리카락을 잃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손톱도 깎고 발톱도 깎습니다. 게다가 저는 쓸개도 떼어내고 없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잃지 않음’은 물질적 차원으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차원의 표현으로 우리는 말 그대로 머리카락 하나 잃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들을 온전히 보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받게 될 새로운 육신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실제적으로는 전혀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반드시 새로운 육신을 통해 부활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을 믿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우리의 영혼, 우리의 소중한 영혼에는 그 어떤 해악도 가해지지 않고 온전하게 보전될 것입니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생명은 ‘인내’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 또한 마찬가지로 그 내적인 의미를 올바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도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지요. 예수님은 육신의 생명을 내어주시고 전혀 다른 생명을 얻으신 것입니다. 사실 다른 의미로 그분은 원래부터 살아계셨고 늘 살아계실 따름입니다. 다만 우리의 눈에는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훗날 반드시 죽음이라는 단계를 거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죽음은 절대로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생명이 싹트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며 살아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 생명을 인내를 통해서 얻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이를 알아보려면 ‘인내’를 치워보면 됩니다. 우리에게 참을성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인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을 이루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진득하게 앉아서 공부하지 못하는 아이를 보고 우리는 인내가 없다고 표현합니다. 그 아이는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을 하겠지요. 장난감을 가지고 놀거나 컴퓨터 게임을 할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을 하는 아이는 훗날에 얻을 것, 지금의 인내를 통해서 얻어낼 수 있는 미래의 것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 아이는 지금 얻을 수 있는 것을 얻겠지만 미래에 다가올 실제적이고 더 좋은 것을 전혀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마찬가지의 일이 벌어집니다.
인내가 없는 사람은 현세의 삶을 최대한 확장하고자 합니다. 지금의 편의와 안락을 최대한 증진하려고 하고 훗날 다가올 것을 무시해 버리게 되지요. 지금의 것을 전부라고 생각하고 훗날 다가오는 것을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삶, 그것이 인내가 없는 삶이고, 그 반대, 즉 지금의 삶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삼고 참아 견디고, 훗날에 다가올 것을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삶이 인내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에겐 참을성이 있을까요? 우리에겐 인내가 있을까요? 우리는 과연 하느님과 더불어 다가오는 진실한 삶을 향한 기다림이 존재할까요? 아니면 모든 것을 이 세상의 생명에 걸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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