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돈이 사람을 살리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사랑이 사람을 살립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좋은’일은 그러합니다. 사람이 돈을 수억 벌어서 다른 이를 돕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을 도울 사람은 한 푼 없어도 남을 돕습니다. 이건 저의 체험에서 나오는 말이니 믿으셔도 좋습니다.
저는 부유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 보았습니다. 사제라는 직분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의 만남을 주선하게 합니다. 부유한 이들은 자신의 부를 바탕으로 얻은 교양이 있기는 했지만 희생적이거나 헌신적이지 않고 오히려 방어적이고 교만하고 위선적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부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고 그로 인해서 생겨나는 일로 골치아파 했으며 자신이 가진 것을 내세우려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었고 속은 썩어나지만 겉으로는 괜찮은 척 해야 했습니다.
반대로 가지지 못한 이들은 교양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식기를 어떤 순서로 들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고, 심지어는 에스컬레이터를 한 번도 타보지 못해서 주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하나 있으니,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들이 배를 고파 보았기 때문에 남들이 배고픈 고통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이 삶의 기본적인 문제에 고통스러워 했기에 남들이 고통스러워할 때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연대하고 일치하여 있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을 ‘획일화’ 시킬 수는 없습니다. 선한 부자도 (드물지만) 분명히 있었고, 또 가난한 이들 가운데에서도 탐욕이 하늘까지 미치는 사람도 적잖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통을 당해본 이가 다른 고통당하는 이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지요.
지금의 저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와 있습니다. 저는 요즘도 제가 일상적으로 누리는 것들에 새삼스럽게 놀라곤 합니다. 제가 몰고 다니는 차가 얼마나 발전된 기술의 집약체인지, 그리고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삶 속의 모든 것들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과연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을까요?
지금의 사람들은 아프리카 아이의 사진을 SNS에 올리고 ‘좋아요’를 누르면 돈이 기부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돈은 절대로 그렇게 기부되지 않습니다. 누군가 구체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여전히 가난한 이는 굶주리고 소외당하고 고통당하게 마련입니다. 쉬운 방법으로 선행을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런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라고 말이지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려면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쉬운 사랑을 찾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추상적인 이상에 빠져 살지 말고 내가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서 그것을 이루도록 노력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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