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금 타는 이들과 노래 부르는 이들, 피리 부는 이들과 나팔 부는 이들의 소리가 다시는 네 안에서 들리지 않고, 어떠한 기술을 가진 장인도 다시는 네 안에서 찾아볼 수 없으며, 맷돌 소리도 다시는 네 안에서 들리지 않을 것이다. 등불의 빛도 다시는 네 안에서 비치지 않고, 신랑과 신부의 목소리도 다시는 네 안에서 들리지 않을 것이다.(묵시 18,22-23)
성질 못된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싸움 잘 날이 없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러한 이들 가운데 빛의 자녀들, 즉 선한 이들을 끼워 두셨습니다. 완충제 역할을 하라고 말이지요. 그래서 그나마 이 세상은 숨돌리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때가 이르면 하느님은 이 완충제 역할을 하던 이들을 모두 당신의 나라에 데려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서로의 충돌을 가로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수금을 타는 이들, 노래를 부르는 이들, 피리 부는 이들, 나팔 부는 이들은 그나마 삶에 기쁨을 가져다주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기술을 가진 장인은 사람들이 서로 일치하고 도우며 살아갈 수 있는 내적 보화를 지닌 장인들 즉 성인들을 의미합니다. 맷돌 소리는 곡식을 가는 소리, 즉 사람들의 영혼을 채울 양분을 준비하는 이들의 노력을 상징합니다. 등불의 빛은 그나마 희미하게라도 하느님을 찾을 수 있었던 가능성을 의미하고, 신랑과 신부의 목소리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응답을 의미합니다. 멸망할 운명을 지닌 도성 바빌론 안에서는 그 어떤 긍정적인 면도 발견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탕녀는 뭇 남성을 유혹하여 끌어내는 역할을 하는 존재입니다. 바로 사람들을 유혹하여 죄악에 빠지게 만든 존재, 사탄을 의미하지요. 그 탕녀는 심판을 받게 되고 증오의 불구덩이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타오르는 연기가 영원히 지속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반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대된 이들은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의로움으로 자신을 가꿔온 이들, 거룩함으로 인내 가운데 머물렀던 이들은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의 세상은 겉으로 찬란함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이런 외적인 허영이 끝장날 때가 다가옵니다. 그 때가 언제이냐구요? 그건 하느님만이 아실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때가 ‘언제’이냐가 아닙니다. 중요한 문제는 반드시 다가오게 될 그 때를 대비해서 과연 나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