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승리하는 사람은, 내가 승리한 뒤에 내 아버지의 어좌에 그분과 함께 앉은 것처럼, 내 어좌에 나와 함께 앉게 해 주겠다. (묵시 3,20-21)
문은 손으로 두드립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의 문을 두드리는 방법은 다릅니다. 하느님은 ‘말씀’으로 문을 두드립니다. 진리와 생명의 말씀, 믿음과 사랑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의 문을 두드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두드림을 느낄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분이 하는 말에 흥미를 가질까요? 한국에 돌아와서 미사를 많이 드립니다. 우리 한국 신자분들은 참으로 열심합니다. 자매님들은 미사보를 곱게 쓰고 남자분들은 정장을 입으시고 근엄하게 거룩한 전례에 참례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전례는 때로 너무 상투적이 되어 버려서 그 어떤 감흥도 주지 못하는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독서 말씀을 ‘독서자’에게만 맡겨 버립니다. 즉, 그들이 알아서 읽게 두고 정작 우리는 미리 읽지도 제대로 듣지도 않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문을 두드릴 때에 문 안에서 손님을 맞을 준비를 갖추고 있지 않으면 문을 두드린 손님은 떠나 버리고 맙니다. 신부님께서 때로 가정 방문을 하는데 아무도 집에 없고 또 집에 있으려 하지도 않으려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택배 만큼은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우리의 관심사를 너무나도 잘 드러내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말씀이 선포될 때, 즉 거룩한 미사의 독서와 복음은 별 관심이 없다가 인터넷 기사나 텔레비전 뉴스는 집중을 하고 듣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관심사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찾는 것을 얻게 마련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이는 그분을 만나 얻고, 세상을 찾는 이는 세상을 찾아 얻을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분과 함께 은총의 잔치에 참여하여 함께 거룩한 음식을 먹고 싶고, 또 그분의 어좌에 함께 앉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삶의 목적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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