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따름으로써 우리가 얻는 보상은 과연 무엇일까요? 물론 우리는 그것을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최종목표는 구원을 받는 것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이 구원이라는 것을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전혀 존재하지 않던 것을 마지막 순간에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을 점점 키워 나가다가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성탄절에 자고 일어나면 받는 선물이 아니라 지금부터 우리가 조금씩 만들어나가 성탄절에 완성시키는 선물인 셈이지요.
좀 더 본격적으로 ‘구원’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쉽게 말하면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느님께서 주권을 펼치시는 행복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지요. 하지만 그 나라는 단순히 들어간다고 즐길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 나라는 지금부터 우리가 준비해 나아가야 하는 나라이지요. 우리가 하느님의 주권을 지금부터 즐길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이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사랑이 넘치는 나라에 들어가서도 전혀 그 사랑을 즐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합니다. 사람들은 사랑할 줄을 모릅니다. 사랑이라는 것을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를 편하고 쉽게 채우는 것으로 대체해 버리고 말았지요. 서로의 욕구를 채우는 과정을 사랑이라는 단어로 치환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전혀 사랑이 아닙니다. 그 증거는 자신들이 원하던 것들이 상대에게서 사라질 때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뻐서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은 그 대상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선호하는 자신의 욕구를 사랑한 셈입니다. 자신의 욕구가 상대의 미모를 통해서 채워지기에 그 상대가 미모를 유지하는 동안 그 상대를 필요로 한 것 뿐이지요. 이 거짓된 사랑은 지금의 배우자보다 더 이쁜 사람이 등장하는 순간 무너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그 자체로 사랑하기보다 하느님을 통해서, 혹은 하느님과 연관된 것들을 통해서 나에게 얻어지는 유익을 더 사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리와 선과 사랑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욕구를 종교적인 차원에서 사랑하는 것일 뿐인 경우가 더욱 많지요. 그래서 그러한 것들의 허물이 벗겨지고 나면 나는 하느님에 대한 가식적인 사랑도 상실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짜 사랑을 배워야 하고 그것을 지금부터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는 그것이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것이지요. 지금부터 그릇을 빚다가 죽음의 순간에 그 그릇을 화로에 넣어서 마지막으로 굳혀 버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 하는 사랑의 훈련은 그릇을 더욱 크고 아름답게 만들게 됩니다.
하지만 사랑을 훈련한다는 이 표현은 언뜻 아름답게 들리지만 그만큼 처절한 일도 없는 셈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것이기보다는 많은 경우에 힘들고 슬픈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오늘날의 세상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사랑을 구걸하고 사랑을 받으려고 하지 사랑을 내어줄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사랑을 키우려는 사람은 사랑에 굶주린 이들에게 시달리게 되고, 또 나아가서 이런 사랑을 파괴하려는 이들에게도 시달려야 하는 것이지요.
이런 일련의 시련들을 우리는 ‘십자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랑하는 이를 존중하고 함께 기뻐하기 보다는 시기하고 질투하고 파괴하려고 드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한데 모이지 못하고 저마다의 욕구를 채우려 하기 때문이지요.
세상 사람들은 일치해 있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한 분이신 하느님 안에서 하나로 모여 들지만 세상 사람들은 저마다의 세상을 구축해 놓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타인의 행복을 자신의 것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오직 자신만이 최종적으로 행복해야 의미가 있다고 굳게 믿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의 세상은 질투와 시기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들에 대해서는 특히나 그 정도가 심합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 사랑을 키워 나가야 하고 따라서 우리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훈련되어 커진 사랑을 마침내 천상에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바로 상급이 됩니다.
십자가 때문에 우리가 불행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우리의 영광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며 그분의 영광에 동참할 희망을 품고 있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는 십자가는 곧 우리가 미래에 지니게 될 영광의 증거가 됩니다. 그래서 성인들은 십자가를 사랑하였고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 십자가를 지려고 노력을 한 것입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은 내용입니다. 고통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니요. 고통은 마땅히 피해야 하고 삼가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고통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통은 누구나 피하고 싶은 것이지요. 그러나 먼 훗날 얻어야 할 영광에 비하면 지금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성인들은 기꺼이 지금의 고통을 지니고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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