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 하고 네가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 내가 너에게 권한다. 나에게서 불로 정련된 금을 사서 부자가 되고, 흰옷을 사 입어 너의 수치스러운 알몸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제대로 볼 수 있게 하여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 (묵시 3,17-19)
묵시록에서 하느님은 교회의 오류들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마지막 바람은 그들의 멸망이 아니라 ‘회개’입니다.
사실 모든 문제의 근본은 내적인 면에 존재합니다. 속에서 곪은 것이 결국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지요. 내면의 영혼이 헐벗어서 그것이 외적인 오류와 죄악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충만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기에 세속적인 쾌락으로 그것을 대체하려 하고 그러다보면 외적으로 그러한 기쁨들을 찾아 나서다가 결국 죄악에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내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그분이 허락하시는 평화에 만족하지 못하니 그 대체품으로 재물로 얻어지는 기쁨, 명예와 권력을 통해서 누리는 기쁨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치유하는 방법 역시도 내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내적인 충만감을 돌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무너지지 않는 희망과 사랑의 삶, 그리고 굳건한 믿음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그들이 따라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한 사람을 내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변화시키는 것보다 차라리 건물을 세우고 도로를 내는 것이 더 쉬울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를 내적 변화로 초대하고 결국 그의 의지를 올바른 방향으로 세우도록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또한 영적인 전쟁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투쟁을 외적인 것으로 치환하려고 합니다. 정말 변해야 할 내적인 것을 소홀히 하고 그러한 일들을 외적인 요소들로 바꾸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드러나는 면모들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성당 건물을 하나 더 세우면 자동으로 신앙심이 굳건해 진다고 믿습니다. 기도회를 많이 열고 묵주기도의 단수를 많이 채우면 그것을 열심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오해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내적인 자세는 외적인 것으로 표현되고 드러나겠지만, 외적인 것이 곧 내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속이는 자들도 많고 위선과 가식에 사로잡힌 이들도 많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내적인 변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 과정은 더디고 오래 걸리겠지만 우리는 내적인 변화를 이루는 데에 집중해야 합니다. 바로 그 내적인 변화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인내와 겸손과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데에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일상 안에서 이루어 내어야 합니다.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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