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필리 3,18-19)
바오로 사도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분명히 알고 이 글을 쓴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일어나게 될 구체적인 미래의 일을 바오로 사도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한다고 애절하게 표현하는 것이지요.
많은 이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단순히 몇몇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갑니다. 즉 십자가를 기피하고 거부하며 심지어 그것을 증오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살아갑니다.
그들은 허울 좋은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신앙생활이지요. 하지만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신앙 생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신앙의 근본인 십자가를 피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궁극적으로는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가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것의 실천적인 과정 안에서는 우리에게 ‘십자가’로 다가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흐름은 우리가 가려는 방향을 거스르기 때문이지요.
주일 미사는 나가지만 그 이외의 활동은 전혀 하지 않겠노라고 선언하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최소한의 신앙의 요구는 수용하지만 그 이상 발을 담그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만일 일주일 내내 노가다를 뛰는 노동자라면 마땅히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남은 여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공동체 안에서 봉사를 하는 것이 성가시고 귀찮아서, 그저 쉽고 편한 신앙생활을 추구하기 위해서 단순히 주일 미사 신자로 전락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른 의미가 됩니다.
그런 그들이 골프장에는 문턱이 닳도록 드나든다면, 다른 취미 활동은 기를 쓰고 하고 있다면 그들은 단순히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섬기는 자들일 뿐입니다. 즉 자신의 욕구에 충실한 사람들이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이들이지요.
그런 이들은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수치가 될 것들을 영광이자 자랑거리로 삼지요. 자신의 배를 불린 일을, 자신의 잇속을 챙긴 일을 자랑스레 남들에게 떠벌리고 다닙니다. 자신의 새로 산 핸드백을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나고 또 재산이 늘었다고 자랑을 하고 다닙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본질적인 면은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셈이지요. 인내가 성장했다거나 진실한 사랑과 용서를 실천했다거나 하는 일은 있지도 않을 뿐더러 자랑하고 싶지도 않은 셈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살아갑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 뿐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