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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1주(3가지 조심할 것들)


대림1주

3가지 조심할 것들.

방탕(exceso): 우리나라 말로 '방탕'으로 표현된 이 말은 '무절제, 과잉, 과도, 과분함'에 해당되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솔직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지금 막연히 소유하려는 그 많은 것들은 실제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가 아닌가를 물어보아야 한다. 솔직하게만 바라볼 수 있다면 많은 것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루를 꾸려 나가기 위해서 그토록 많은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적지 않은 것들은 세상이 우리에게 주입시킨 필요들일 뿐이다. 나는 '커피'를 마시고 싶은 거지 어떤 특정한 성분이 첨가되어 있고, 어떤 특정한 향이 가미된 커피를 원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그 향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광고판에 적힌 묘한 카피문구를 보고는 그걸 원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처럼 과도한 무언가를 조심해야 한다.

만취(embriaguez): 술이 취하면 어떻게 되는가? 기분이 흥겨워지고 다른 사소한 것들을 잊을 수가 있게 된다. 이런 상태에 놓인 사람들이 많다. 세상에 취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진정으로 신경쓰고 돌보아야 할 자기 자신과 하느님의 관계를 잊고, 세상의 사물들에 흥건히 취해 있는 이들이다. 결국 앞서의 방탕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자신의 진정한 요구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채로 세상이 내어주는 맛깔스러움들에 취해 이것을 맛보고 저것을 맛보고 하면서 점점 더 하느님과 자기 자신에게서 멀어져가고 있는 형국이다. 취한 사람은 자기 집도 잊어버리고,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하는지도 둔감해진다. 세상에 취한 사람은 자신이 사랑해야 할 사람을 증오하고, 자신이 도달해야 할 영원한 생명을 잊어버린 채로 살아간다. 우리는 취해 있는 상태로 살아가서는 안된다.

근심(preocupación): 근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무언가를 지금 끌여들어와서 '지금'이라는 시간을 채우는 것을 말한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다가오지 않았음에도, 과거의 무언가를 끌어다와서 지금의 시간에 고민을 하고, 미래에 일어나지 않은 것을 지금 준비하기는 커녕 공연히 쓸데없는 걱정으로 마음을 채우는 사람들이 적지않다. 이렇듯 근심에 사로잡히기 시작하면 '지금'에 해야 할 일을 손에 잡을 수 없게 된다. 지금은 사랑해야 할 때인데 과거의 죄책으로 스스로 한탄만 한다던가, 지금은 충분히 가지고 있고 도와주어야 할 시기인데 미래에 있을지도 모르는 부족을 미리 앞당겨 땡겨와서 걱정을 하면서 돈을 꼭 쥐고 저축만 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근심에서 스스로를 자유로이 해야 한다. 그리고 진정으로 근심해야 할 것을 근심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진정한 구원이다.

예수님은 이 세 가지에 사로잡혀 마지막 날을 준비도 없이 보내지 말라고 하셨다.
방탕, 만취, 근심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자.
그리고 현재에 충실하고,
하느님에게 한 걸음 다가서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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