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무슨 스페셜리스트로 만들려는 시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의 인간관계,
예수의 경제,
예수의 정치...
제발 그런 헛짓거리들은 그만 그쳤으면 좋겠다.
신성모독이란 건 다른 게 아니라 그런 게 바로 신성모독이다.
신적인 위치에 놓인 것을 인간의 자리로 끌어다 내리는 것이 바로 신성모독이다.
신부님하고 술 한 잔 하다가 어깨 툭 쳤다고 '독성죄' 아니냐고 고민하는
그런 게 신성모독이 아니란 말이다.(실제로 그런 사람 있음.)
예수님의 마음은 오직 하느님과 그분의 뜻 뿐이었다.
그런 예수님의 마음이 복음 안에서 다양한 상황 속에서 펼쳐질 뿐이다.
예수님은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으셨고,
또 반대로 그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완성'하셨다.
예를 들어보자.
아버지는 형제들이 오손도손 살기를 원한다.
그런데 첫째와 둘째가 장난감의 소유권을 두고 싸우기 시작한다.
그래서 첫째가 와서 아버지에게 이런 저런 불만을 토로하면 아버지는 첫째의 등을 두드려주시며 미소 지어 주신다.
그리고 둘째가 또 찾아와서 같은 일을 하면 아버지는 또 둘째의 등을 두드려주시며 미소 지어 주신다.
사실 아버지는 그 장난감이 누구에게 가든 상관이 없는 것이고,
다만 이 철없는 아이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 서로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즉, 그들의 관심사가 한 단계 격상되기를 바라시고 계시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 것에만 시선이 매여있는 이 두 아들들은 이런 아버지의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고,
서로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며 도리어 아버지를 미워하기 시작한다.
진도를 조금 더 심하게 나가보면,
이 아버지는 그 형제간의 다툼에 당신이 죽어서라도 해소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두 형제의 핍박을 받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장례식에서 잠깐 슬퍼한 이 형제들은 시간이 흘러 여전히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
그런 일이 '믿음의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아직도 모르고,
자신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들어높일 생각은 못하고,
반대로 예수님을 자신들의 저급한 수준으로 끌어내려서는
예수님을 여기다 끼우고, 저기다 끼우고 자기 입맛대로 써먹곤 한다.
도무지 예수님의 지극히 높으신 가치를 알아채지 못하는 저급한 족속들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은 어느 분야에서 특기가 있는 분이 아니다.
마치 건전지처럼 모든 것을 활력있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예수님이 제대로 들어간 사람이나 공동체는 분명 '사랑'이라는 결과물을 내어놓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사랑'의 이면에는 수많은 '십자가의 희생'이 존재한다.
오늘도 적지 않은 이들이
'자신의 구미에 맞춰' 예수님을 이용하려 들 것이다.
속지 말자.
마음을 들어높여,
우리의 천한 영혼이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도록 노력하자.
아멘.